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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음악의 챔피언 레니 번스타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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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2호 편집팀⁄ 2009.04.07 11:36:41

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1958년부터 1969년까지 레니는 그의 스승 미트로풀로스에 이어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1958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 필과 청소년 콘서트를 53회나 방송하였다. 이 자료는 DVD로 출판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중요한 교육 자료가 되었다. 또한, 레니는 평생 ‘못 말리는 교육자(compulsory teacher)’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1955년에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성인들을 위한 음악교육 프로그램(Ominibus)을 방송하였으며, 탱클우드와 유럽에서 젊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지도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브랜다이스와 하버드 대학의 초빙교수로 강의도 하였다. 또한, 음악에 대한 책도 썼다.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Unanswered Question)은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지금도 필수적 교과서가 되고 있다. 그는 그때까지 별로 주목을 못 받고 있던 말러 심포니 전곡을 뉴욕 필과 녹음하였으며, CBS와 무려 200번을 녹음하여 LP 레코드를 만들어냈다. 그 후 그의 명성은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하여,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고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비엔나 필 하모니가 그를 계속 초청하고 녹화도 하였다.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미국이 부자의 나라지만 문화 특히 클래식 음악은 없는 나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비엔나 필이 레니와 그렇게 많은 공연을 하고 녹화를 한 이유는 레니의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1970년에 레니는 유니텔(Unitel)과 계약을 맺고 비엔나 필과 말러· 브람스· 베토벤 심포니의 전곡에 이어 슈만과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등 수많은 음악을 녹화하기 시작하였으며, 후일 이것들이 CD와 DVD로 나왔다. 그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와 카라얀은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비엔나 필은 번스틴을 내세워 1~2등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말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며 비엔나 필의 전신 국립 오페라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지만, 미국 태생의 레니가 그들에게 말러의 음악을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가 유럽에 준 가장 큰 선물은 거슈윈(Gershwin), 찰스 아이브(Charles Ive), 코플랜드(Copeland) 같은 미국 토종 음악과 자신의 미국 스타일 작곡을 유럽에 보급시킨 점이다. 그리하여 레니는 미국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유럽과 전 세계의 찬사와 존경을 받은 음악인이 되었다. 이만하면 미국 음악의 챔피언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미국 태생으로 유럽의 존경 받은 음악인 그러면 세계 최고의 평을 받고 있는 비엔나 필과 전 유럽은 왜 그렇게 레니를 좋아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레니는 미트로풀로스· 라이너· 쿠체비츠키를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클래식 음악을 승계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레니는 독일 음악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음악적 유산을 살려 자신만의 음악을 창조하였으며, 거슈윈· 아이브· 코플랜드 같은 미국 음악을 세계에 전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레니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온더타운 같은 뮤지컬, 캔디드, 트라블 인 타히티 같은 오페라, 종교음악(Kaddish) 그리고 실내음악까지 손을 대지 않은 음악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필자가 그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다. 그는 사망하기 며칠 전 인터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People)과 음악이고, 나는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망하기 3일 전에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했는데, 이 마지막 콘서트에서 평생 피운 줄담배로 기침을 심하게 하여 콘서트를 중단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콘서트를 끝까지 해냈다. 그가 말러나 베토벤을 연습하고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만인에게 행복과 용기를 주기 위해 신들린 사람처럼 혼신을 다해 지휘를 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항상 행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잘 알려진 동성연애자 또는 양성연애자였지만, 칠레 출신의 여배우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키웠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원하던 뉴욕 심포니의 음악감독이 되기 위해 결혼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았다. 그의 스승 중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도 동성연애자였으며, 그에게 작곡을 가르친 코플랜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트로풀로스와는 애인관계라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때 레니는 그의 처를 떠나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였지만, 그의 처가 암에 걸리자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끝까지 돌봐주었다. 레니는 타고난 교육자였다. 그는 보스턴의 탱글우드와 유럽에서 많은 젊은 지휘자들을 가르쳤는데, 가장 유명한 제자로는 세이지오자와 마이클 토마스를 들 수 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음악감독인 마이클 토마스도 게이인데, 그의 스승이 그랬듯이 ‘Keeping Score’라는 타이틀로 방송을 통해 음악교육을 했으며, 이 자료도 DVD로 나와 있다. 지금은 게이들도 인권을 보호받으면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레니의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차이코프스키가 그랬듯이 이것이 레니에게 큰 심적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국인과 유태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전 유럽과 세계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받는 음악인의 한 사람이 된 이유는, 그의 타고난 재능에 더하여 그의 끝없는 도전과 노력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는 평생 피운 줄담배 때문에 생긴 심한 폐질환으로 1990년 10월 14일에 서거하였다. 그의 영구차가 뉴욕의 거리를 지나갈 때, 길가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일꾼들이 헬멧을 벗고 작업을 잠시 중단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지만, 필자는 DVD로 그의 열정적이면서도 우아스러운 감성에 넘치는 지휘를 볼 때 깊은 감동과 용기를 얻는다. 그에게 “고맙소. 그대의 음악은 내 인생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오”라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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