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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에스트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21세기에 가장 애호받는 클래식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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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4호 편집팀⁄ 2009.04.20 22:57:04

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1911년 5월 18일)는 유명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나, 작곡가로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말러는 총 10개의 심포니(10번은 미완성)와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음악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인기가 치솟은 이유는, 카라얀, 번스타인, 리카르도 카이리 등 거장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한 젊은 아마추어 지휘자의 노력도 큰 몫을 하였다. 1982년, 25세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 증권잡지사의 창립자 길버트 카프란은 세계의 재정을 좌지우지하는 증권관리자들이 모인 IMF 총회에서 말러의 심포니 2번을 링컨센터에서 지휘하였다. 그 후 카프란은 5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심포니를 지휘했다. 그가 1988년에 녹음한 CD는 17만5,000장이 팔렸는데, 이 기록은 번스타인과 솔티의 CD보다 3배가 넘는 숫자이다. 그리하여 과거 3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 심포니보다 말러를 선호하는 젊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많이 생겼다. 말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에 유태인으로 보헤미아(체코)에서 태어났다. 6세 때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으며, 15세에 비엔나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세에는 안톤 브루크너가 강의하던 비엔나 대학에서 역사·철학 그리고 음악을 공부했다. 20세인 1880년에 그는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비엔나·프라하·라이프치히·부다페스트 오페라에서 지휘를 하였다. 1893년부터 1896년 여름휴가 중에 그는 심포니 1번을 수정하고 심포니 2번과 3번과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37세인 1897년에는 말러가 무엇보다도 원하던 비엔나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리이므로 유태인은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말러는 천주교로 개종을 한다. 말러는 15세에 집을 떠난 후 유태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그는 개종 미사가 끝나고 나오면서 한 친구에게 “오늘 나는 셔츠를 갈아입었다”고 말하였다. 젊은 말러에게는 종교적인 신념과 상관없이 음악과 출세를 위한 전교였다고 볼 수 있다. 음악적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10년 간 지키면서 그는 바그너의 Ring Cycle 전곡을 연주하는 등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고 오페라의 수준을 확실히 끌어 올렸다. 또한, 1898년부터 1901년까지는 비엔나 필하모니를 지휘했다. 비엔나에서 그는 1년에 110번 이상을 지휘하였다. 이것은 오늘의 지휘자들이 자기가 속한 오케스트라와 1년에 단 10~20번만 연주를 하고 나머지는 객원지휘자로 세계를 돌아다니는 관행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유태교적인 언론은 그를 계속 씹었고, 실증을 느낀 말러는 10배나 되는 월급을 받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불행한 가정생활…아내의 외도, 어린 딸의 사망 필릭스 멘델스존과 말러는 가장 뛰어난 유태인 작곡가이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신교로 전교했고, 카톨릭이 된 말러는 지금 이스라엘에서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종교를 국가의 생존권과 동일시하는 유태인에게 개종은 아주 심각한 비애국적 행위로 간주되는 것 같다. 1902년, 42세의 노총각 말러는 작곡과 그림을 공부하고 있던, 유명한 화가의 딸 알마(Alma)와 결혼한다. 말러보다 20년 연하인 알마는 뛰어난 미인이었으며, 비엔나의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Klimt)와 연애 소문이 나는 등 사치스럽고 화려한 젊은 여인이었다. 결혼 후 알마는 작곡을 계속하고 그림도 그리고 싶어했으나, 말러는 이를 금지시켰다. 결혼에 싫증을 느낀 그녀에게는 애인이 생기고, 말러가 사망한 후 그 남자와 결혼한다. 말러는 두 딸을 가졌는데, 1907년에 5세인 마리아 아나가 성홍열(또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자 말러는 거의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처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또 자신이 심장병(심장판막증)과 부정맥(심방세동)이 있으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그는 음으로 양으로 죽음에 집착하게 된다. 심방세동은 아주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심장박동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말러는 보도계를 차고 다녔으며(아마도 의사들은 하루에 몇 보 이상을 걷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처에게 심장박동 소리를 자주 듣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의 심포니 9번에는 아주 무질서한 리듬이 나타난다. 번스타인에 의하면, 이것은 말러 자신의 심박동을 음악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말러 심포니 9번은 평화롭고 순진한 소년시대(제2악장)로 시작하여 인생에 작별을 고하고 죽음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심장질환에 걸려 51세에 저 세상으로 말러의 인생은 다섯 가지의 슬픔과 고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소수민족 보헤미아인의 서러움, 둘째는 오스트리아 시민으로서 독일인들에게 받은 차별대우, 셋째는 개종은 했지만 유태인으로서의 차별, 넷째는 젊은 아내의 공공연한 정사로 인한 고민, 다섯째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 환자의 고통 등이다. 이런 인생의 재난들이 그의 위대한 심포니를 작곡하는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1908년에 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1년 간 지휘하였으나, 토스카니니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190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11년까지 그는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의 마지막 해에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의 30개 도시에서 48회의 연주를 계약한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악화되어, 연주를 반도 끝내지 못하고 병을 고치러 파리로 떠난다. 파리의 의사들은 새로운 주사약을 시도해보았으나 허사였고, 그해 5월 18일에 심장판막증의 가장 심각한 합병증인 심내막염으로 51세의 젊은 나이에 말러는 이 세상을 마감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페니실린이었으나, 이 약은 40년 후에나 발명되었다(내 개인적인 견해는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인정받는 교향곡 9번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음악적 유산은 생생히 살아 있다. 20세기의 거의 모든 거장들은 말러의 음악을 연주했으며, 카라얀과 번스타인 등 많은 지휘자들이 말러 심포니를 CD와 DVD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해가 갈수록 말러 음악의 인기는 상승하고 있으며, 21세기에는 말러가 가장 애호받는 클래식 작곡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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