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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스탈린의 탄압이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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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5호 편집팀⁄ 2009.04.27 14:14:13

슈만·리스트·쇼팽·베를리오즈 등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사랑은 영감을 주었고 큰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1906년 9월 25일~1975년 8월 9일)에게는 사랑보다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이 그 동기부여의 자극제가 되었을 것 같다. 일부에서는 쇼스타코비치를 공산주의에 굴복하고 순종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과 측근과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작곡가로 살아남기 위해 한때 협조를 하기는 했었지만, 끝까지 스탈린의 잔인한 독재에 저항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의 눈 밖에 난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제정 러시아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burg)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피아노 공부를 했다. 1917년에 러시아의 붉은 혁명이 성공한 후, 1919년에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의 졸업작품인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었다. 졸업 후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바르샤바(Warsaw)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정서적으로 경직된 스타일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입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를 만났고, 그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1번을 초연하였다. 그 후 그는 작곡에 전념하였으며, 1927년에 교향곡 2번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는 오페라 ‘코’를 작곡하였으나, 스탈린의 공산당 문화 관료들로부터 형식주의(Formalism)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형식주의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미술 등의 장르에서 내용보다는 형식 또는 스타일 위주라는 부정적인 뜻이다. 1927년에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지휘자였던 소렌티스키와 평생친구가 되었는데, 그를 통해 말러(Mahler) 음악의 영향을 받게 되고, 심포니 제4번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그 당시의 어둡고 비관적인 소련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34년 간이나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하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는 무관한 이 작품은 대중과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치명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오페라는 절망적인 한 부부 중에서 처가 남편을 쥐약으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하루는 스탈린과 그의 공산당 거물급 지도자들이 볼쇼이 극장에 나타나 이 공연을 관람하던 중 스탈린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돌연 오페라 극장을 떠났다. 며칠 후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브다는 쇼스타코비치의 형식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런 작곡가들의 장래는 좋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 후 그의 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작품 의뢰도 고갈되어, 그는 정부와 공산당이 제작하는 선전 영화음악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에 붉은 혁명에 성공하고 레닌이 집권한 후 러시아는 당분간 문화적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자유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음악가·문학가·화가들은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방가르드주의를 실험하기도 했으며, 초기에 쇼스타코비치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스탈린이 트로츠키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절대권력을 장악한 후, 경제는 어려워지고, 수십만의 정치범들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사라졌으며, 많은 ‘인민의 적’들이 공공연히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들이 행복하게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과 종교를 주제로 한 말러의 심포니를 좋아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행복·환희·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주제로 한 듯했으며, 스탈린은 이 곡을 용납할 수 없었고, 맥베스 부인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 후 쇼스타코비치는 ‘올바른 비판에 대한 답’이라는 표제가 붙은 교향곡 5번을 작곡하면서 정치적 재활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허사였다. 스탈린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찬양하기 위한 예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아마비·중풍으로 고생, 폐암으로 사망 히틀러와 2차 대전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게 된다. 1941년에 히틀러의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900일 동안 10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쥐를 잡아먹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죽음의 저항으로 전쟁을 이겨냈다. 이때 레닌그라드에 갇혀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나치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면서 교향곡 7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쇼스타코비치는

그러나 후일에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에서 “이 교향곡은 레닌그라드의 고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스탈린이 거의 파괴한 레닌그라드를 히틀러가 완전히 파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이다”라고 썼다. 1948년에 그와 소련의 많은 예술문화인들은 다시 한 번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위협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 후 1949년에는 서방과의 관계개선 노력에 따라 쇼스타코비치를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보내는 등 유화정책을 펼쳤으며, 1951년에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을 위대한 정원사로 묘사하는 칸타타 ‘숲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스탈린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참지 못할 고통을 피하고 음악을 계속하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을 것이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정치적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960년에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그 후 그의 교향곡 4번이 공연되었다. 후일 그는 아들과 처에게 협박을 받아 입당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습관적인 흡연가이자 술꾼이었다. 1955년에는 소아마비로 다리 한쪽이 불편해졌고, 1958년에 중풍 증세를 보여 오른팔이 불편해지자 그는 피아노 연주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그는 교향곡 15개, 관악 4중주 15개 외에도 총 147개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가 사망한 1975년에도 6개의 작품을 쓰는 등 최후의 순간까지 작곡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러시아의 유명한 지휘자 발기에프는 1997년에 제작된 ‘스탈린에 저항하는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against Stalin)’라는 기록영화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잔인한 독재자 스탈린에 용감하게 저항한 작곡가로 규정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탈린의 끊일 줄 모르는 탄압이 오히려 쇼스타코비치를 더 훌륭한 작곡가고 만들었다고 결론 짓고 있다. 아마도 스탈린의 탄압이 없었다면 쇼스타코비치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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