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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광의 아프리카 미술과 친해지기

Joseph Cartoon,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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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5호 편집팀⁄ 2009.04.27 14:05:04

■카툰은 어떤 작가인가 카툰(1973~)은 대부분의 케냐 작가들처럼 와두(Sane Wadu)가 미술운동을 전개한 응제차(Ngecha)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목탄이나 연필에 불과했지만, 그런 재료를 오랫동안 사용한 것은 오히려 기본기를 다지는데 유용했다. 그리고 그림에의 열망을 키워 나가는데 촉매로 작용되었다. 카툰은 타니(Shine Tani)를 만나면서 내재되어 있던 예술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냐의 미술대학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려온 천재적 작가들의 역량을 키워줄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툰이나 젊은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미대에 들어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재능이나 열정에 비해 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994년, 카툰은 나이로비에 있는 와타투(Watatu) 갤러리의 루쓰(Ruth Schaffner) 관장 덕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1995년, 미국에서의 전시를 필두로 캐나다·프랑스·독일·덴마크·일본 등 국내외에서 50여 회의 단체전과 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99년,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Contemporary African Art(Thames& Hudson) 표지에 카툰의 그림이 실렸다. 2001년에는 영국의 ROSL(Royal Over Seas League) 공모전에 당선되었고, 2005년에는 East Africa Art Biennale에 케냐를 대표하는 작가로 초청되었다. 카툰의 그림은 얼핏 전통을 계승한 것 같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현대적이다. 사회 공동체보다는 가족의 화합이나 소통, 남녀의 사랑이나 개인의 욕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색에 대한 관념 역시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흰색이나 붉은색은 더 이상 신이나 인간을 대변하는 색이 아니다. 그에게 색은 그저 색일 뿐이다.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풀어 나가는데도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세계 미술계가 카툰을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카툰 그림 읽기 큰 손과 큰 발은 삶에 대한 태도와 의식의 내용이다. 손과 발이 유난히 큰 카툰의 그림은 아프리카 앤티크 조각에 나타난 의미와 궤를 같이한다. 큰 손은 부지런한 생활을, 큰 발은 안정적인 생각을 뜻하는 것으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나 지도자가 지녀야 할 윤리적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큰 손에서는 삶의 태도를, 큰 발에서 의식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카툰이 꿈꾸는 희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다양한 문양이나 동일한 문양의 반복은 카툰이 지닌 꿈과 비례한다. 카툰에게 있어 문양은 문자와도 같다. 그림에 다양한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은 그만큼 바라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의 희망은 서로 다른 세계들 간의 어울림이다. 동일한 문양을 반복해서 패턴을 형성시킨 것도 결국 균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40여 종족으로 이루어진 케냐, 카툰은 그림 속의 다양한 문양이나 동일한 문양의 반복을 통해 자신의 꿈을 얘기하고 있다. 물고기·항아리·집 등은 일상에의 소망을 담은 꿈의 구체적 내용이다. 카툰의 꿈은 현실적이다. 물고기는 더 이상 종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토템이 아니라 음식일 뿐이다. 항아리는 신의 눈물을 담는 성스러운 도구가 아니라 물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둥근 집이 아닌, 현재라고 하는 사각형 모양의 집에서 가족의 행복을 꿈꾼다. 그렇다고 카툰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행복은 과거에서 온 것임을 잘 알고 때문이다.

■ Mini Interview 작가에게 물었다. 왜 손가락과 발가락을 네 개만 그렸느냐고…. 작가는 네 개의 손가락에 대해 손바닥에 가려진 엄지손가락을 이야기했다. 다섯 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가락 하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작가는 대답을 못 했다. 그러나 전혀 낯설어하지를 않았다. 자신은 네 개라는 숫자가 좋아서 그렇게 그렸다고 한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네 개를 그린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그의 세계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한다. 의식의 내용에 자신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끔 잊는다. 카툰은 드러나지 않은 한 개의 손가락과 한 개의 발가락을 통하여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 혹은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을 희망한다. 자신의 부족한 하나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남이 지닌 부족한 하나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카툰은 네 개의 손가락과 네 개의 발가락을 통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은연중에 학습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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