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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국가적 영웅이 된 음악인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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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8호 편집팀⁄ 2009.05.19 14:28:15

많은 음악인들은 오랜 세월 자기 고향과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음악인으로 활동하다가 조국으로 돌아가 국민들로부터 영웅적 환영을 받았다. 19세기에는 쇼팽(Chopin)과 리스트(Liszt)가 일찍이 고국인 폴란드와 헝가리를 떠나 파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를 반대해서 망명의 길을 택하여,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리에서 병사했다. 장수한 리스트는 부타페스트로 돌아가 음악원장을 지내면서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마지막 인생을 보냈다. ■폴란드의 루빈스타인, 체코의 쿠벨리크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1887~1982)이 11세의 어린 나이에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 베를린으로 음악 공부를 위해 떠났으며, 파리·런던·스페인·남미 그리고 미국에서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등장하였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집안이 어려워지자 베를린에서의 음악 공부를 포기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며, 스무 살 때에는 베를린에서 갈 곳도 없고 숙박비도 지불할 수 없는 신세가 되자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그마저 실패하자, 제2의 인생을 찾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사람이다. 음악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그는 연습을 소홀히 하는 편이었으며, 기술적으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고, 와인·시가 그리고 여자를 좋아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음악성 즉 기질(temperament)과 끼(showmanship)로 관중들을 매혹시켰으며, 20세기 초반의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오랜 세월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1975년 88세의 나이에 자기의 출생지인 폴란드의 로즈(Lodz)로 돌아가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영웅의 환영을 받으며 연주를 하였다. 그가 95세의 나이에 서거한 지 5년 후에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폴란드 정부는 루빈스타인의 부인과 네 자녀를 초대하여, 국가적 영웅이 된 루빈스타인의 탄생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그 후 그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여받았다.

또 하나의 국가적 영웅이 된 음악인으로서 쿠벨리크(Rafael Kubelik:1914~1996)를 들 수 있다. 그는 체코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며, 부친(Jan Kubelik)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쿠벨리크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과 더불어 저녁 식사 후에 매일 2인을 위한 피아노 곡을 연습하였으며, 프라하의 음악원을 졸업한 후 1942년에서 1948년까지 체코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히틀러와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해 온 그는 1948년에 공산 정권이 체코를 장악하자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택하였다. 그 후 체코의 공산 정부가 그의 귀국공연을 권유하자, 그는 체코의 모든 국민이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까지는 체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쿠벨리크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 1950~1953년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61년부터 1979년까지는 바바리의 라디오 심포니를 지휘하였으며, 1972~1974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지휘하였다. 그는 평생 드로브자크(Dvorak), 스메타나(Smetana), 야나체크(Janacek) 같은 체코 작곡가들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특히 스메타나의 애국적 음악 ‘나의 조국(Ma Vlast)’의 녹음은 유명하다. 체코공화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물러나자, 쿠벨리크는 42년 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체코로 돌아가서 온 국민의 진정한 영웅이 되고, 체코 필하모니와 같이 Ma Vlast를 연주하고 녹음하는 기회를 찾았다. 이 감격스러운 장면들은 DVD “Rafael Kubelik music is my country”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여러 개의 심포니와 오페라도 작곡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한 차원 높은 지휘를 할 수 있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냉전시대의 철벽을 허문 음악인들

또 하나의 음악인으로서 조국에 영웅으로 돌아간 피아니스트는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4~1989)이다. 그는 제정 러시아 시절에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러시아의 붉은 혁명 2년 후인 1919년에 키에프 음악원을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을 시작하였는데, 굶주리던 러시아 시민들은 빵과 계란으로 입장료를 대신했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1926년에 베를린에서 첫 외국 공연을 하였고, 1932년에 처음으로 토스카니니(Toscanini)와 같이 공연을 하였으며, 1933년에는 그의 딸과 결혼하여 1940년에 미국에 정착하였다. 토스카니니는 카톨릭이었지만, 둘 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종교가 문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남성과의 애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성공적인 피아니스트였지만 우울증에 시달리고 무대기피증까지 발생하여 수년씩 여러 번 연주 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89년에 생애 최고의 영광을 맞이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초대를 받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연주를 하였다. 이 연주는 미국 전역에 방송됨으로써 미국에서도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의 노인들까지도 62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호로비츠의 피아노 연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지금 DVD를 통해 볼 수 있다(Horowitz in Moscow). 한 국가의 영웅이 된 음악인으로서 클라이번(Van Cliburn:1934~)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련과 미국 간에 냉전의 전성기였던 1958년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미국의 영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Khruschov)와 친해지고 러시아 국민의 사랑과 신임을 받음으로써 처음으로 공산국가의 철벽에 금을 내기 시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2003년에 그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훈장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러시아의 최고 훈장인 우호훈장을 받았다. 클라이번이야말로 한 음악인이 국가의 위상을 얼마나 높여줄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음악인 지원 인색한 한국의 현실

우리나라에도 정경화·정명훈·백건우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음악인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루빈스타인·호로비츠·쿠벨리크 같은 세계적인 거장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음악인들도 세계 정상급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제 외교와 정치가 그렇듯이, 음악과 예술도 국력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제 기량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음악인 바렌보임(Barenboim), 펄만(Perlman), 메타(Mehta:유태인은 아니지만 바렌보임의 절친한 친구), 주커만(Zukerman), 고인이 된 뒤프레(Du Pre:바렌보임의 처)들은 유태인 마피아(Jewish Mafi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마피아(Mafia)는 악당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를 한 가족처럼 밀어주고 당겨준다는 뜻이다. 1967년에 우리의 정경화 씨가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주커만과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이때 주커만은 심사위원장인 유태인 아이작 스턴(Isaac Stern)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정경화의 스승이자 주커만의 스승이었던 갈라미안(Galamian)도 이 콩쿠르에 나가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런 특수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정경화 씨가 당연히 우승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음악인은 29년 간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한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1935~)이다. 그는 토론토 심포니의 젊은 지휘자로 있었는데, 1970년에 보스턴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때 일본의 소니 회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보스턴 심포니에 거액의 후원금을 지불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로써 소니 회사는 일본 음악인의 위상을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음반을 제작함으로써 명예와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동안 체육계에 막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세계에 스포츠 강국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음악인을 위한 우리 정부나 사회의 지원은 아주 인색한 것 같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30년 이상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음악인들에 비하면 ‘깜짝쇼’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많은 유망주들이 있다. 특히 첼리스트 장한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새로운 별들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한국의 음악인들이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세계 최고의 무대를 정복할 때 전 세계는 한국인은 컴퓨터를 잘 만들고 쇼트트랙을 잘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서양의 격언이 있다. 우리도 우리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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