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헝가리가 배출한 음악의 거장 리스트(Franz von Liszt : 1811년 10월 22일~1886년 7월 31일)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노의 대가(Virtuso)일 뿐만 아니라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음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바그너와 더불어 신독일음악(New German School) 또는 신낭만주의(New Romanticism)의 창시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교향악 대신 교향시(Symphonic Poem)를 썼으며, 드뷔시(Debusy)와 쇤베르크(Schonberg) 같은 현대음악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무조성(Atonal) 음악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가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기 있는 연주자였으나, 평론가들은 그의 작곡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도 이런 새로운 움직임에 반대하였다. 그는 대중의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평론가들은 이런 사람이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헝가리 환상곡(Rhapsody) 같은 곡을 통해 헝가리의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을 클래식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남녀평등주의자 백작부인과의 조우 리스트는 1811년에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6세부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한 귀족(아버지의 고용인)은 어린 리스트를 음악 공부를 위해 비엔나로 보내고, 그 후 리스트는 파리에서 살게 된다. 비엔나에서 그는 베토벤의 수제자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당시 모차르트의 경쟁자였던 살리에리(Salieri)로부터 작곡을 사사받았다. 12세 때인 1823년에 그와 그의 부모는 파리로 갔으며, 파리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였다. 1831년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나고 화려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Paganini)의 연주를 본 후 리스트는 파가니니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고 하루에 10시간씩 맹렬한 연습을 시작하였으며, 그의 화려하고 열광적인 연주는 파리 시민들을 매혹시켰다. 그는 22세에 6년 연상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쇼팽(Chopin)의 애인이 된 조지 샌드(George Sand) 부인의 소개로 이루어졌는데, 이 부인은 아이들이 있는 유부녀로서 남장을 하고 시가를 태우며 안장 없이 말을 타기 좋아하는 등 파리의 가장 유명한 남녀평등주의자였다. 그녀는 일부일처제는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여러 애인을 거친 화제의 소설가 백작부인이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에서 절대적 왕권을 물리치고 민주적 왕위제도를 수립한 1840년의 7월 혁명의 결과 귀족과 서민 드리고 남녀평등 시대가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와 유사하게 다구 부인도 자녀를 둔 유부녀였으며, 남자의 이름(Daniel Stern)으로 문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다구 부인은 젊은 리스트를 쫓아다니기 시작하였고,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같이 리스트의 집으로 들어가자 세상은 리스트를 비난하였으나, 사실은 리스트가 추격자가 아니라 추격을 당한 젊고 순진한 청년이었다. 이 둘은 시선이 곱지 않은 파리를 떠나 스위스와 이태리를 여행하였으며, 이 경험이 배경이 되어 리스트는 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를 작곡하였다(1848~1853). 그러나 세 자녀를 둔 그들의 사랑은 5년 후에 막을 내렸다. 다구 부인은 음악인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리스트의 작곡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작곡가에게 이 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소설에서도 리스트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묘사하였다. 같은 여성주의자였던 조지 샌드도 그의 소설에서 쇼팽을 평가절하하여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두 여자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여성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캐롤린 공주와의 운명적인 만남 리스트는 당시 세계 음악의 거장들(쇼팽·베를리오즈·슈만·바그너)과 친구가 되었으며, 1842년 이후 리스트의 음악은 전 유럽을 열광케 하였다. 특히 여성 팬들은 연주 후 리스트의 장갑과 손수건을 서로 빼앗기 위해 난장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인기와 최고의 출연료에 도취되지 않고 작곡을 계속하였으며, 문학과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글도 많이 썼다. 1847년(36세)에 리스트는 러시아에 살고 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애인 캐롤린 공주를 만나게 된다. 공주는 문인이었으며, 결혼하고 딸이 있었으나 남편과 별거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선연주를 하였는데, 이때 캐롤린 공주가 거금을 희사한 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둘은 점차 사랑에 빠졌다. 캐롤린 공주가 러시아를 떠나 독일의 바이마르(Weimar)로 이사를 하면서 리스트를 초청하고, 1848년부터 1861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를 중단하고 궁전의 음악감독이 되어 작곡에 전념하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그 제자 중 하나가 뷜로우(Bulow)였으며, 후일 그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Cosima)와 결혼을 한다. 바이마르에 머무르는 동안 리스트는 많은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피아노 콘체르도 2개(1849), 피아노 소나타(B Minor, 1953), 15개의 헝가리 랩소디(1851), 12개의 교향곡(1848~1861), 사랑의 꿈(Liebestraum, 1950), 그리고 파우스트(1954)와 단테(Divine Comedy, 1857) 심포니 등 유명한 곡들을 많이 남겼다. 아마도 이때가 리스트의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절이었을 것이다. 1860년에 리스트와 캐롤린 공주는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교황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카톨릭 신앙을 저버리고 결혼을 할 수는 있었으나, 그들은 종교에 충실하기를 원하고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1866년에 캐롤린 공주는 로마의 빌라에 자리 잡고 26년 동안 그곳에 살았는데, 그 동안 단 한 번만 24시간 이상 집을 떠나 은둔한 생활을 택했다. ■사후에도 추앙받는 훌륭한 인품 리스트는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왕래하면서 종교음악을 작곡하고, 부다페스트에 음악원을 세워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종종 캐롤린을 방문하면서 여생을 지냈다. 리스트는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캐롤린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로마에 머무르는 26년 동안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가 쓴 편지는 후일 600페이지의 책 4권으로 출판되었다. 리스트는 1886년(75세)에 바그너가 사망한 후 딸 코지마가 주관하는 바이로이드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캐롤린 공주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둘이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왜 정신적 사랑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교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큰 몫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스트는 뛰어난 음악인으로서만 명성을 날린 것이 아니라, 거의 수업료도 받지 않고 400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유럽에서 큰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자선 콘서트를 열어 이재민들을 도왔다. 또 베토벤의 동상 건립기금을 마련해주는 등 덕망이 높은 인간으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의사들은 좋은 인간이 되어야 좋은 의사가 된다고 한다. 음악인들도 좋은 인간이 되어야 훌륭한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