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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 인사동을 가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유산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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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23호 편집팀⁄ 2009.06.23 22:26:00

송영순 자유기고가 sys5602@hotmail.com 서울에 살면서 촌놈이 되지 않으려면 가볼 곳으로 대표적인 곳이 남산·인사동·신촌·용산·광화문(경복궁)·63빌딩 정도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서울에 살면서도 그런 곳에 가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어쩐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품격이 결정되는 지역 즉 인사동 거리를 답사해보련다. 가끔 약속 때문에 가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건성으로 지나다녔지만 이번처럼 샅샅이 요밀조밀 살펴보기는 처음이다 우선 서울 지하철 5호선을 타고 광화문역에 내리거나,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 내리도록 하자. 그 다음 인사동 방향으로 10분 정도 걷다보면 팻말이 보인다. 경복궁 150m, 삼청동 500m, 북촌한옥마을 300m, 인사동…여기는 바로 북쪽 인사동 입구이다. 흔히 북인사마당이라고 한다. 반대쪽은 남인사마당이다. 관광안내소도 남북으로 두 군데가 있는데, 엄청난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시 인사동이다! 인사동을 그린 대형 붓, 정말 크다! 팻말에서 눈동자를 돌리다보면, 좀 특이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얼핏 봐도 붓인 것 같다. 대형이다. 만들기도 잘 만들었다. 이 작품의 뜻은 “도시가 작품이라는 서울시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인사동을 화선지 삼아 서울의 중심이자 종로의 중심인 인사동을 문화적·전통적인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보존·계승·발전시키고자하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인사동 입구 왼쪽에는 안내소가 있으며,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쪽에는 오래된 대문처럼 만들어 일본어 안내지도가 관광객을 반가이 맞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뒤쪽에는 인사동과는 어울리지 않을 제과점의 <대형 타조 조형물>이 시선을 끌어 당긴다. 빵을 한 조각 사먹으려고 했더니, 조각으로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외국에선 손님 입장에서 조각으로도 판매하는데, 좀 아쉽다. 인사동의 역사와 유래

인사동은 종로 중심지에 위치하면서 안국동 로터리로부터 종로2가의 탑골공원까지의 구역을 말한다. 법정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종로2가)에서 관훈동 136번지(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도로로, 길이 0.7㎞이며,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쇼핑 명소이자 메리의 골목(Mary's Alley)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인사동길은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으로 인해 관훈동·인사동·광통교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생긴 길이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로 방계명(坊契名)을 동(洞)으로 개칭하면서 관인동(寬仁坊)의 ‘인(仁)’자(字)와 대사동(大寺洞)의 ‘사(寺)’자(字)를 조합해서 인사동(仁寺洞)이라 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으로 인사정(仁寺町)으로 개명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 다시 인사동(仁寺洞)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서북학회터·승동교회·탑골공원·원각사지십층석탑·수운회관·운현궁·조계사 등의 역사문화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조선 말기의 정치가인 박영효가 살았던 가옥을 개조하여 꾸민 경인미술관이 있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외치다 인사동을 오가다보면 중간중간에 화랑이나 갤러리 말고도 문화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특히 탑골공원은 그렇다.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2호)과 대원각사비(보물3호), 팔각정(서울유형문화제재3호), 3.1독립선언기념탑(80년 4월 15일 건립), 손병희 선생 동상과 만해 한용운 선사비 등이 있다. 이 공원에 있는 3.1정신 찬양비는 1967년에 박종화 선생이 글을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서울의 중심 표지석 옆에는 독립선언 유적지 중의 하나인 승동교회 옆에 3.1운동 찬양비인 기념석(1933년)이 있다. 글귀는 ‘3.1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이때만 하더라도 ‘모의를 했다’는 의미가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나본데,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을 중심으로 전문학교 대표들이 승동교회 1층 밀실에 모여 제1회 학생지도자 회의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숙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뤄지자, 학생대표들은 이곳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28 삼일독립선언서(전문 1,762자)를 배포하게 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독립선언서는 세계각국의 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삼았던 태화관 자리에는 현재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도, 민영환 선생 자결터 등 인사동은 민족 독립의 염원을 담은 거리였다. 추억을 되살리는 간판 이름들 오른쪽에는 인사동에 처음 온 국내 관광객을 위해 한글로 된 지도간판이 있고, 왼쪽에는 일본 관광객을 위해 일본어로 된 지도간판이 서 있다. 시선에 확 띄는 편의점 2층에는 40~50대가 살아오면서 농담 삼아 한번 쯤 뇌까리던 ‘별다방 미스리’가 둥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게다가 간판 밑에는 coffee, 추억의 도시락, 전통차 등이 동시에 열거되어 있다. 추억의 도시락 ...우리는 이것을 일본말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벤또’라고 했다. 흔히 다꾸앙(단무지),와리바시(젓가락),다마네기(양파) 등등.

그 옆에 다시 재미있는 간판이 있다. ‘머시꺽정인가’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을 하면 ‘무엇이 걱정인가’라고 된다. 여긴 오래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부담 없는 가격의 일반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들도 스스럼없이 구경하고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수많은 간판들이 질서는 없다만 자기 얼굴을 소개하고 있는데, 갤러리와 화랑, 00당 등의 이름이 가장 많다. 팽이를 만들어 파는 사람도 있고, 리어카에서는 액세서리를 팔면서 4개 국어를 하는 할머니도 보았다. 한국어 외에도 전투영어·전투일본어·전투중국어 등 3개국어를 아주 부담 없이 지껄이면서 외국인과 흥정을 한다. 대단하다. 인사동에서는 기본적으로 영어와 일어를 하지 못하면 장사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역시 수준이 높은 동네이다. 대한민국 40% 골동품 상점 집결지 대한민국의 40% 이상의 골동품 상점이 모여 있다. 물론 70년대에는 성수기였으나, 80년대 들어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골동품 상점이 떠나는 바람에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가격은 주로 1만 원부터 수백만 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거의 모든 상점은 오래된 책이나 사진·서예·기념품·사진·도자기·목제품·보석 등을 판매한다. 도자기들은 신라시대의 질그릇부터 조선시대의 백자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인사동 물품들의 90%가 중국산이라는 소문이 있으니…. 인사동에서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기념품은 전통 한국 도자기품이다. 이 도자기들은 실용적이고, 또한 장식하는 데에도 탁월하다. 1999년 4월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예술품을 극찬한 후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가장 인기가 있는 도자기품은 호리병박이고, 가격은 10만 원에서 20만 원까지 다양하다. 한편, 인사동은 골동품·액세서리·예술품과 책등이 사고 팔리는 벼룩시장의 이미지가 있어 외국에 종종 소개될 때는 벼룩시장의 형태로도 소개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인사동에는 한국 전역이나 전 세계에서 온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봄과 가을에 인사동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절정을 이룬다. 갤러리의 천국, 그리고 먹거리 어쨌던 인사동은 갤러리 천국이다. 통이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통큰 갤러리’가 빨간색으로 눈에 확 들어온다. 여기가 인사동 3길이다. 그 옆에는 ‘갤러리 美昊’ ‘박일용 첩 展’ ‘고촌화랑’이 있다. 하여튼 갤러리의 간판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먹거리도 엄청 많다. 취사선택의 여유도 많고, 외국인들도 즐기는 요리가 많다. 히딩크가 왔다 갔다고 해서 그게 언제라고 아직도 써먹는 식당이 있다. 평생 사용할 거라고 하는데, 직접 시식을 해본 결과, 글쎄올시다이다. 한마디로 실망이다. 음식 맛보다는 상술만 앞선 섭섭함으로 인사동 먹거리 이미지가 떨어질까봐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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