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순 자유기고가 sys5602@hotmail.com 이번호에는 서울시 사적 제10호로 등재되어 있는 서울성곽과 조선시대 왕궁, 오늘의 청와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북악산을 소개한다. 그간 서울에 살면서, 광화문 사거리를 매일 오가면서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악산에 올라간 적도 없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둘러싼 서울성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였다. 그만큼 바쁘게 살면서 다른 곳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까? 북악산의 첫 관문 창의문 창의문이 있는 성벽 근처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북악산 서울성곽 창의문 쉼터 가는 길’이라고 적혀 있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문화재청이 만든 것인데, 조그만 글씨로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젠 이런 글귀도 지웠으면 한다. 언제는 국민의 품에 없었나? 생각하기 나름일 뿐이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그 사이에 4소문이 있다.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북소문이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던 것이다. 어쨌든, 창의문을 통과하여 계단으로 올라가니 전경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안내를 하는데,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주소 등을 적은 다음 쉼터로 들어가니 또 다른 안내자가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한다. 그는 종이에 적은 내용과 주민등록증을 대조하면서 컴퓨터에 입력을 한 뒤 목걸이 명찰을 내준다. 북악산 서울성곽을 돌 때는 반드시 목에 걸고 다니라는 일종의 통행증이었다. 굽이굽이 역사탐방로, 탁 트인 전망도 일품
북악산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르막이라서 그런지 계단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찔하다. 언제 저 많은 계단을 올라간단 말인가! 말이 북악산 서울성곽이지, 무거운 돌덩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높은 산의 등선을 따라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성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이 핑핑 돌 정도인데, 이 높은 곳까지 적군이 쳐들어오더라도 성곽에 올라서기도 전에 힘이 빠져 나자빠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악산 서울성곽의 길이는 4.3km라고 한다.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물론, 서울성곽의 전체 길이는 18.2km로 서울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북악산(342m)·낙산(125m)·남산(262m)·인왕산(338m)의 능선을 잇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구간이 창의문~와룡공원 구간이다. 어떤 이는 역사탐방로라고도 한다. 사실 중간중간 짧은 구간을 걷다 보면 탐방로가 되겠지만, 서울성곽 모든 구간을 돌거나, 와룡공원에서 창의문이 아니라 창의문에서 와룡공원 방향으로 가면 탐방이라는 이야기는 쏙 들어간다. 높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더운 날씨에 금방 지쳐버리고 탐방이라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하면서 쉬기에 바쁘다. 더군다나 필자는 인왕산 산행을 하면서 약간의 자신감을 가진 터라 바로 북악산에 도전했는데,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되어 있다 보니 너무 힘들어 수시로 계단에 걸터앉는 수모를 감수했던 것이다 어쨌든, 창의문을 출발해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탁 트인 전망이 모든 것을 보상한다. 서쪽에 인왕산을 두고, 북으로 북한산의 비봉과 보현봉이 보이며, 정상에서 청운대와 곡장·촛대바위를 지나 숙정문에 닿는 구간에서는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숙정문에서 와룡공원이나 홍련사까지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하다. 서울성곽의 역사 사람들은 북악산((北岳山 343m=백악산白岳山)이라고 하면 정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 때부터 북악산을 금산(禁山)이라 하여 출입을 통제한데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기습 공격하면서 북악산 출입이 전면 통제되기도 했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때 북악산 옆에 있던 인왕산이 개방된 이후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완전 개방되기까지 14년이 걸렸던 것이다. 흔히 박정희 정부를 두고 북악산의 아픔을 이야기하지만,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부터 김대중 ‘국민의 정부’를 거쳐 노무현 ‘참여정부’에 와서야 겨우 개방된 질곡을 두고는 말들이 없다. 여기서 잠시 과거에 서울성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자. 서울성곽은 1395년에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 길이 5만9500자(약 18.2㎞)의 기본계획을 만들었다. 도성 1차 건설공사는 1396년 1,2월에 49일 동안 이뤄졌으며, 경상도 ·전라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11만8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지반이 웅덩이로 되어 있던 동대문 지역은 농한기인 8, 9월 49일 동안 7만9400명을 동원해 완공했다. 동서남북의 사대문과 사소문도 이때 준공됐는데, 문루의 누각은 그 후 건축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해 완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422년에 세종이 전국에서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성곽 보수·확장 사업을 벌였으니,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서울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규모에 비추어볼 때 엄청난 대공사였고, 공사 중에 사망한 사람만도 872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성곽을 재정비했던 1704년까지 260년 동안 성곽은 부분적으로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물론, 만리장성과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되니…비교하지 말지어다. 숙정문은 음기가 세다고?
성곽을 돌다 보면 숙정문이 나타난다. 서울성곽의 북대문인데, 남대문인 숭례문(‘예를 숭상한다’)과 대비시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문이 아니라, 서울성곽의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숙정문 지역은 풍수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으로 전해져 왔다. 조선 후기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을 전하고 있는 반면,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북악산 등반, 서울성곽 구경하기
1 와룡공원에서 출발하기 ▲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온다. 초록 버스인 종로 02번을 타고, 성균관대 후문(종점)에서 하차. 걸어서 10분이면 와룡공원에 도착하여 출발! ▲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온다. 초록 버스인 종로 08번을 타고, 명륜3가(종점)에서 하차. 걸어서 10분이면 와룡공원 도착! 2 홍련사 쉼터에서 출발하기 ▲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성대 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온다. 초록 버스인 111번, 2112번을 타고 명수학교(종점)에서 하차. 걸어서 10분이면 홍련사에 도착! 3 창의문 쉼터에서 출발하기(가장 힘든 코스, 사람들도 적게 온다) ▲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온다. 초록 버스인 0212번, 1020번, 7022번을 타고 자하문 고개에서 하차해 쳐다보면 바로 보인다 주의 사항 1 다른 산과는 달리, 북악산 서울성곽의 유람에는 시간 제한이 있다. 그래서 집에서 늦게 나오면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방시간은 봄·여름·가을(4월~10월)에는 09:00~15:00이고, 겨울(11월~3월)에는 10:00~15:00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이다. 2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지참해야 한다 3 사진 촬영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인 만큼 허용된 지역에서만 가능하고, 군 시설물(초소·탄약고 등)의 촬영은 금지된다. 그리고 돌고래쉼터·백악쉼터·백악마루·청운대·촛대바위·숙정문 등은 촬영해도 되지만, 말바위전망대·곡장도 촬영이 금지라는 점을 알고 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