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 방향은 계열사·비주력사업·유휴자산 매각을 통한 자금확보다. 형식은 기업들의 법적 채권단인 주거래금융기관이 주채무기업의 신용평가를 통해 자유롭게 한다는 모양새지만, 청와대의 독촉, 윤증현 경제부총리의 촉구, 진동수 금융감독원장의 구체적 방향 제시, 금융위원회의 채권 금융기관을 향한 엄중한 문책 예고 발언 등 사실상 국가 주도의 구조조정이다. 대상 기업으로는 금호아시아나·동부·동양·SK·두산 등 굵직한 주요 재벌 그룹이 망라돼 있다. 사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 이후 벌어진 세계적 신자유주의 금융 시스템 붕괴 쓰나미를 피해 가기 위해 재계는 여러 가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는 유휴자산 및 계열사 매각도 포함돼 있다. 재계도 위기감을 느껴 M&A에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 등을 통한 소식을 보면, 이명박 정부는 재계 안정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위해 금융감독원을 통해 재계와 은행에 빅딜 수준의 M&A를 사실상 강요하고 있는 반면, 재벌들은 지원만을 요구할 뿐 버티기로 일관하는 모양새인 것 같다. 하지만 내심을 들여다보면, 재벌 그룹들이 계열사 매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실제로 지난 5월까지 재무건전성, 현금 유동성 및 재무비율에서 건전성에 문제가 드러났지만, 정부와 금융권에 지원만을 요구한 채 정작 구조조정 요구를 피하기에 급급한 일부 재벌들도 있었다. 아직도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환상을 가지고 상류사회의 체면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3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 강제적 구조조정에 볼멘소리를 하는 대기업들은 없다. 물론 그 이유는 재벌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 표명이었다. 실제로 재벌그룹들이 채권 금융기관과의 경영구조 개선 약정 체결 및 이행 과정에서 불성실하게 임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이명박 대통령, 윤증현 경제부총리, 김종갑 금융위원장 등이 나서서 확고한 의지를 밝히고 재계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계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 즉 부도나 퇴출 등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현실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도대체 팔리지 않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우 금호생명·금호산업 등을 일찌감치 M&A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그리고 최근에는 결국 유동성 위기의 원천이던 대우건설 자체를 눈물을 머금고 시장에 내놨다. 동부그룹도 동부메탈을 내놨다. 동양그룹에서 계열분리한 오리온그룹도 미디어 계열사 온미디어와 외식사업을 영위하는 롸이즈온을 매물로 내놨다. 은행중심 금융그룹인 신한금융그룹도 비씨카드를 매물로 내놨다. 또 LG그룹과 캐나다 노텔네트웍스의 합자회사인 LG노텔도 매물로 나와 있는다. 이는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의 재계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채권은행들을 통한 정부의 압박도 장난이 아니지만, 결국 생존을 위해 일단 조직을 슬림화할 필요성을 점차 느껴 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재벌 그룹들이 버티기를 포기한 시점이다. 금호·동부·오리온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군들이 정부의 압박, 사회적 요구, 금융권의 견제 등에 끝까지 버틸만큼 버텨 오다가, 지난달 이후 하나 둘씩 항복을 선언하면서 계열사 및 유휴자산 매각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M&A 시장에서는 지난달 이후 매물의 급격한 증가율을 기록하게 됐다. 그러나 M&A 시장에서는 이들이 계열사 매각을 선언하기 전부터 매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난 2004년 현대그룹의 계열분리 이후 M&A 시장에 던져졌던 현대건설은 지금도 최대의 매물이다. 현대건설은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과 정몽준 고문의 현대중공업그룹이 서로 매수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포스코·한화 등도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현대건설의 행보는 아직 실마리도 보이지 않고 있다. 또 국내 최대 방위산업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우조선해양도 한화그룹이 인수를 시도했다가 매각자인 산업은행과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채 결국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됐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아직 매수자가 나서지 않고 있으며, 현대종합상사는 공개매각을 시도했지만 결국 유출돼버렸다. 또 캠코도 정석기업을 비롯해 비상장주식들의 공개매각을 실시하면서 M&A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정부의 압박이든 금융권의 공개매각이든 기업들의 자발적 의사결정이든, 갖가지 원인에 의해 M&A 시장에는 매물들이 넘치고 넘쳤다. 대우조선해양·대우건설·현대건설 등과 같은 대형 물건도 있지만, 정석기업·롸이즈온 등과 같이 비교적 소형인 물건들도 존재한다. 또 손해보험사들 중에서 2~3곳이 매물로 나올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으며, 증권업계의 구조조정 이야기도 돌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팔겠다는 물건들인 반면, 사겠다는 물건은 거의 없다. 오히려 매수자가 나타나면 바로 매각협상과 실사로 들어간다. 협상 전 언론 플레이, 매수자 줄세우기 등 매각자 입장에서 행해지는 탐색전은 볼 수 없다. 워낙 매수자가 없기 때문이다. 오리온그룹은 온미디어 매각 결정 소식이 전해지고 CJ그룹의 매수의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후 불과 2~3일만에 양자 간 매각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나왔다. 사업관계에서 항상 있을 법한 재고 튕기고 흔들어서 가치를 올리는 탐색전이 일체 없었다는 점은 여유 없이 메마른 우리나라 M&A 시장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 국내 물건 관심 없고 해외 것만 군침 이 같은 매수 불균형에는 기본적으로 우리 재계가 이들 매물을 소화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사실 우리 기업들은 지난 2006년 6월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 발생 이후 초기대응 미흡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경영악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일부 대기업들은 자금난에 빠져 있다. M&A 시장에 매물이 넘쳐나는 현상도, 현 정부가 금융감독 당국을 통해 재벌 그룹들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 이유도, 결국 세계적 금융·경제위기로 인해 민간 기업들의 펀더멘털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을 비춰보면, 재벌들이 울며겨자 먹기로 내놓은 물건들을 충분히 사들일 수 있을 만한 곳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물론 삼성그룹,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등 일부 대기업군들은 세계적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자금이 있다. 그러나 이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삼성SDI의 한 관계자는 “단순히 자금여력 측면에서만 M&A에 참여할 여력이 있느냐를 본다면 현대건설·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물건 4~5개는 여유롭게 소화할 수 있겠지만, 그 같은 자금여력들은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대비한 자금이며, R&D 및 신성장동력 개발을 위한 착수금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도 “M&A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반면, 한화그룹의 경우 지난해 대우조선해양 인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국내 물건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있다. 7일 한화그룹의 한 관계자는 “해외 기업 인수를 검토 중에 있다”고 귀띔했다. 한화그룹이 인수를 적극 검토 중인 회사는 미국과 대만 등지의 엔지니어링 관련 업체들이다. 이미 크레디트스위스(CS) 증권을 인수 자문회사로 선정하는 등 기업매수 작업이 깊숙이 진행되고 있다. 한화그룹의 행보가 이처럼 전격적인 이유는 M&A를 통해 신성장사업을 확보하겠다는 김승연 회장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우조선해양과 관련하여 산업은행과의 분쟁 이후 국내 물건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두산그룹의 절묘한 꼼수 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금호종금은 미국 AIG금융그룹이 매물로 내놓은 부동산 자산인 뉴욕 본사 건물을 1억5500만 달러(한화 2000억 원)에 매수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국내 부동산 자산을 매입할 의사는 없다. 대우건설 포기 선언까지 한 이상, 오히려 부동산 자산과 계열사 주식 매각을 통해 현금 마련에 혈안이 돼 있다. 반면, 끝까지 계열사 매각을 거부하고 버티기에 성공한 그룹도 있다. 두산그룹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산그룹은 지난달 3일 삼화왕관·SRS코리아·두산DST·한국우주항공산업(KAI)을 DIP홀딩스 주식회사에 지분 51%와 계열사 경영권, 오딘홀딩스에 49% 지분을 넘기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두산그룹은 양사로부터 매각대금 7808억 원을 받아 자본금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DIP홀딩스는 두산그룹의 지주회사 두산이 자기자본과 차입금으로 설립한 회사로, 지난 1일 두산의 정식 계열사로 슬그머니 편입해버렸다. 이에 따라 삼화왕관·SRS코리아·두산DST·한국우주항공산업(KAI)은 두산의 손자회사의 지위가 되면서 다시 두산그룹 식구가 됐다. 두산은 DIP홀딩스를 만들고 동사가 위 4개의 계열사를 인수할 만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권으로부터 1449억3000만원을 차입해 부채로 떠안았다. 이로써 두산그룹은 계열사를 매각했으며, 이를 근거로 금융권과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피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