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순 자유기고가 sys5602@hotmail.com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가 세상의 모든 허물을 벗겨버리는 것 같다. 차창 앞에서 열심히 빗물을 씻어내는 와이퍼는 정신이 없고. 이상하게도, 천주교(가톨릭)의 성지인 절두산에 도착하니, 유리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치던 비가 뚝 그쳤다. 정말 신기하다. 이쯤 되면 필자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잠시라도 비를 그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막 도착한 절두산 성지 입구. 차량 통행 차단기는 설치되어 있는데, 관리인이 없다. 그래서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고 대충 소방도로에 세우려고 빈 곳을 찾다가 보니, 차단기 옆에 조그만 글씨로 “버튼을 누르고 잠시만 기다리시오”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아하 ~ 이거야! 버튼을 누르자, 몇 초가 흐른 뒤에 차단기가 짠 ~ 하고 올라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깥으로 나오자, 금방 폭우가 그친 탓인지 시원한 기운을 느낀다. 주변을 둘러보니, 절두산의 아래로는 한강이 무섭게 흐르고, 건너편에는 20세기에 멈춰 있다는 국회의사당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절두산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영화에서 보듯 신비스런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아마도 이 비싼 금싸라기 땅을 천주교에서 매입하지 않았다면 벌써 누군가에 의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절두산 성지를 지나는 전철의 방음벽에 화가가 그린 것인지는 몰라도 십자가 등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마치 유럽에 온 것과 같은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경건한 마음으로 절두산 성지를 하나씩 한 걸음씩 살펴본다. 절두산의 옛 이름은 잠두봉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국 천주교의 최고 성지(聖地)인 절두산(切頭山)의 옛 이름은 잠두봉(蠶頭峰)이다. 봉우리의 모습이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는 뜻인데, 지금은 ‘머리가 잘린 산’의 뜻인 ‘절두산’이 되어 조선 근세사와 궤를 함께 하면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원래 양화진의 동쪽에 있던 잠두봉은 각 지방에서 한강을 타고 올라오는 곡물 수송선과 어물·채소 등을 실은 선박들의 주요 거점이었는데, 병인년(1866년)에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목이 잘리는 바람에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이다. 절두산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이라 적혀 있고, 세종실록에도 <가을두>라 기록되어 있다.이 이름들은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주교 성인 유해 모신 절두산 순교기념관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는 지난 1956년 11월에 양화진 순교지를 매입한 뒤, 1962년 9월 1일 절두산 순교지에서 순교기념탑 제막식을 거행한 이래, 지금까지 절두산 순교기념관 건립, 성해실 조성, 김대건 신부 동상 건립, 박순집 묘 안장, 오성바위 이전, 교황의 한국 방문 첫날 절두산 성지 순례와 함께 한국 순교자 103인 성인 탄생 공식 선포 등에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이 기념관은 절두산의 지세와 한강변을 활용한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가운데 교회사는 물론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기념관은 3층 건물(총 325평)과 종탑(35평), 성당(99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2, 3층은 교회사 관련 유물과 문헌 자료를 비롯한 민속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성당 지하에는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시고 있어 국내외의 많은 관람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지금 공사 중이라 9월 1일부터 개장). 특히 ‘성해실’은 성인 28위의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다. 순교자는 라틴어로 증인·증거라는 뜻을 지닌 ‘martyr’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다”(요한12:24~25)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대목은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이다.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도 비슷한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절두산의 주요 조형물들
1. 형구돌 절두산 성지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기념물이다. 필자는 맷돌도 아닌 것이 맷돌 1개를 세워놓은 모양이라서 궁금했는데, 나중에 종합설명서를 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형구돌은 앞 구멍에 죄수의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였는데,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1974년에 발굴된 것을 여기에 전시하고 있다 2.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절두산 기념관으로 올라가기 전 입구에 있다.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을 하고 있어 처절한 순교 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3. 김대건 신부 동상 절두산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멀리 첫눈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임을 느끼게 하는 조형물이 보인다. 유심히 보니 정말 잘 만들었다. 굳이 김대건 신부라서가 아니라, 국내의 동상 조형물들을 보면 대개 조잡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동상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을 맞아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가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받들어 1972년 5월 14일에 건립한 것으로,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원래 있던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자 103인 성인 중의 한 분이다.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나, 1836년에 불과 15세의 나이로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1845년에 상해 연안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의 박해가 너무 심한 탓에 서품을 받은 지 불과 1년 뒤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를 하게 된다. 4.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 씨와 며느리 신 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 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 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1801년 3월에 순교하였다.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5.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이다. 아버지 박바오로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 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1979년 9월 26일 박순집 등 가족의 공로를 기려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6. 성 남종삼 요한 흉동상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 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7. 해운당대사의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인데, 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의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8. 오성바위와 문지방 돌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다블뤼 안 주교, 오매트리 오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루가), 장주기(요셉)가 서울로 압송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이다. 9.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인데, 필자는 모조품이 아닌 줄 알았다. 직접 보면 영락없이 진품으로 느껴진다. 10. 순교자의 모후와 빨마 1973년에 이순석 교수가 제작, 기증한 것이다. 순교자의 모후는 가로 22.5cm, 세로 125cm 크기의 성모상 부조이다. 빨마는 가로 23.5cm, 세로 154cm 크기인데 빨마가지 밑쪽에 절두산이 새겨져 있다. 현재 박물관 왼쪽 벽면에 위치해 있다. 11.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에 세워졌다. 순교 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하며, 주탑과 함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왼쪽 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하여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12. 야외 14처(십자가의 길)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 부분을 새겨 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 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13. 교황 성하 동상 지난 1984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만든 동상이다. 필자도 교황 동상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족적을 남겼다. 14. 이승훈 베드로 동상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세례자이다. 1756~1801 생애로 일찍이 서양 수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1784년에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귀국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그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절두산 성지를 구경하려면 절두산 성당에서는 미사가 평일(토요일 포함)과 주일 오전 10시, 오후 3시에 있으며, 박물관 관람 시간은 매일 09:30 ∼ 17:00이다(휴관일: 월요일). 정해진 관람 요금은 없고, 방문객들의 헌금으로 대신한다. 단체예약관람(10명 이상)은 방문 2주 전에 예약해야 한다. 절두산 성지의 위치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에 있으며, 연락처는 02-3142-4434(FAX : 02-335-0213)이다 시내 교통은 - 시내버스 : 합정동 로터리 하차, 한강 쪽으로 도보 10분 소요. - 지 하 철 : 2호선·6호선 합정역(7번 출구)에서 한강 쪽으로 도보 10분 소요. - 승 용 차 : 강변북로-성산대교 방향은 잠두봉 지하차도 진입 지점에서 우측 지상 절두산 진입로를 이용하고, 마포 방향일 경우에는 합정역 방면 도로로 진입해 절두산 쪽으로 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