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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백제의 향기 담은 수덕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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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37-138 편집팀⁄ 2009.09.29 14:02:53

글·사진 송영순 자유기고가 sys5602@hotmail.com 가족과 함께 2~3시간만 차로 달리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우리나라 금수강산…. 오늘은 수덕사를 찾았다. 표지판에는 ‘덕산온천’도 보인다.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 495m)에 있는 절이다. 수덕사는 불교 5대 총림의 하나로,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그리고 청도의 운문사, 공주의 동학사와 더불어 3대 비구니 사찰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교를 아는 사람은 수덕사를 선지종찰(禪之宗刹)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고 부른다. 한국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을 계승해온 대표적인 사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표현이라고 한다. 수덕사의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주변의 암자들이다. 호서지방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덕숭산 곳곳에서는 경허·만공·혜월 대선사들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견성암·환희대·선수암·극락암·만월당·운수암 등이 있다. 입구에 보면 안내 표지판이 있다. 특히, 대웅전으로부터 정혜사에 이르는 12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며 홍성읍 쪽을 내려다보는 감흥을 느껴보길 바란다. 수덕사는 입구 주차장 주변부터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입장료는 성인 1인당 2,000원이다. 문헌 없어 창건에 대한 구전 많아 수덕사 입구에서 있는 덕산도립공원 안내판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설명되어 있다. 다른 절의 일주문과는 달리, 수덕사 일주문은 무게감이 나간다. 수덕사는 그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 없다 보니,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즉, 수덕사는 ?백제 15대 침류왕 2년(358년)에 수덕각시라는 관음 화신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고.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였다 하며, 백제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재위 시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백제 법왕 즉위 원년(599)에 지명법사(智命法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수덕사 매표소 입구 설명문에는 위덕왕이라고 나와 있지만…). 그러나 수덕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한 승려로 혜현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혜현이 태어난 해가 569년쯤 되므로 위덕왕 시기로 볼 수 있고, 혜현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다면 이미 수덕사는 창건되어 있어야 하니, 수덕사의 창건 시기는 위덕왕 대나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 대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수덕사가 백제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증거는 문헌 기록뿐 아니라 수덕사 경내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의 존재로도 유추할 수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다 보면 위압감을 느낀다. 부릅뜬 눈을 하고 있는 사대천왕들이 만일 혼이 있어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동방 지국천왕(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천왕), 남방 증장천왕(중생의 이익을 증가시키고 오랫동안 지속케 하는 천왕), 서방 광목천왕(나쁜 것을 물리치고 국토를 지키는 천왕), 북방 다문천왕(불법을 옹호하는 천왕) 등 4대천왕을 보면서 호국불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은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하여 조선 중종 23년(1528), 영조 27년(1751)과 46년(1770), 순조 3년(1803)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보인다. 1937년에서 1940년 사이, 만공 스님이 해체 수리를 하면서 ‘至大元年戌申四月十七日立柱’라고 쓴 먹글씨가 발견되어 고려 25대 충렬왕 34년의 건물임이 밝혀졌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법당이다.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인데,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주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의 두 보살을 봉안한다. 수덕사에서 또 하나, 대웅전 앞마당 한가운데 있는 3층 석탑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되었다는데, 오랜 세월의 산 증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대웅전에 올라가기 전 입구에 있는 스님 동상…설마 다산의 상징은 아닐테고…엄청 큰 스님 동상의 양쪽 어깨에 동자승 5명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다들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나도 찰칵! 수덕사에는 비구니 스님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수덕사에는 비구니 스님이 없다. 산내 암자인 견성암과 환희대에서 산철(해제철)에 50여 명, 결제 기간에 150여 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수이면서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송춘희 씨가 부른 노래 ‘수덕사의 여승’을 기억하는 시골의 아낙들이 가끔 “여기 여자 스님 없어요?” 하고 묻는단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송춘희 가수는 결혼을 하지 않고 불교 포교사로 일하고 있다. ‘수덕사’하면 사람들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애절한 가요를 먼저 떠올리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노래의 작사자 김문응 씨가 수덕사 아래에서 잠을 자고 새벽 예불 시간에 절에 올라왔대요. 마침 젊은 수좌 스님이 범종을 치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승복을 입고 종을 치는 모습이 김문응 씨에게는 갸날픈 여성으로 다가온 거야. 당시는 비구니 일엽 스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았던 때지. 범종을 쇠북으로 표현한 것은 작사자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의 설명이다.

한국 선종의 맥,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 백제 침류왕 즉위 원년인 384년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크고 작은 절들이 나라 곳곳에 세워졌다. 중국 기록에도 ‘스님들과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언급되어 있다. 현재 백제 사찰로 확실히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은 웅진(공주)의 대통사지, 부여의 정림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그리고 예산의 수덕사 등이다. 수덕사를 제외한 3개의 절들이 모두 사지로 남아 있는데 비해, 수덕사는 조계종의 제7교구 본사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덕사가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된 데에는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의 영향이 지대하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어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30본산제를 실시할 당시 수덕사는 마곡사의 말사였지만, 1962년 3월 25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하였으며, 1984년 11월 29일 사찰 행정의 독립성을 가진 종합수도장을 의미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승격하고 초대 방장에 혜암 스님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1986년에는 일본 아스카사(飛鳥寺)와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 교류를 기념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간의 불교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1996년에는 자매결연 10주년을 맞이해 수덕사는 백제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정림사탑(定林寺塔)과 동일한 모양의 탑을 조성하여 아스카사에 기증하였고, 아스카사는 수덕사 성보전시관 건축을 지원을 하는 등 두 사찰 간에 우의를 다지고 있다. 이응로 화백의 사적지와 암각화 수덕사로 들어올 때는 스쳐 지나갔는데, 나오면서 관심 있게 들어가 본 곳이 있다. 바로 이응로 화백의 사적지라고 쓴 표지판이 있는데, ‘절에 무슨 화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일단 무슨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고 사적지를 빙 돌면서 구경을 하다 보면 훌륭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고암 이응로(1904~1898) 화백이 1942년에 여류 화가 나혜석이 출가를 위해 수덕여관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수덕여관을 찾아 기거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수덕여관은 예술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혜석이 1944년에 출가를 포기하고 수덕여관을 떠나자, 이응로 화백은 수덕여관을 매입하고 그림을 그렸다. 현재 수덕여관은 선(禪)미술관으로 리모델링을 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이응로 화백은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69년 수덕여관 뒤쪽에서 직접 추상문자 암각화 2점을 새긴 것으로 유명한데, 바위에 새긴 글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실제로 보니 “와우~대단하다!” 옥의 티라면, 후인들이 이응로 화백을 돋보이게 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안내 표지에 동백림사건을 너무 강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예술인의 시각은 아닌 것 같다. 산중에서는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사찰들을 돌다 보면 글로는 배우지 못한 것을 눈으로 많이 보게 되는데, 이거야말로 살아 있는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대중교통 1)예산에서 수덕사까지 시내버스 12회 운행, 50분 소요. 2)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수덕사행 직행버스 3회 운행, 3시간 소요. 예산 버스터미널→수덕사(06:05~21:30, 17회 운행, 45분 소요). 도로 안내 1)장항선 철도(서울→예산역 06:30~19:50, 13회/일, 2시간 소요). 2)경부고속도로 (서울→천안IC→예산). 3)서해안고속도로 (서울→포승IC→예산). 4)일반국도(남부터미널→예산터미널, 07:20~19:00. 20회/일, 2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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