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헌재가 미디어법 국회 동의 과정의 절차상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통과된 법안 자체는 ‘무효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헌재가 원칙과 현실을 절충한 결정을 내렸지만 논란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한나라당은 ‘재논의는 없다’며 방어에 나섰고, 민주당 등 야당들은 강력 투쟁을 선언해 정치권에 파란이 예고되고 있다. 헌재 판결 들여다보기 지난 7월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미디어법의 효력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 선고는 10월 29일 헌법재판관 9명 중 과반수 의견으로 결정됐다. 헌재는 국회가 지난 7월 신문법·방송법 등의 미디어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의 법률안 심의·의결권을 침해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헌재는 미디어법 중 신문법과 방송법의 가결 선포를 무효로 해달라는 야당 의원들의 무효확인청구는 기각했다. 즉, 절차상 하자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법을 헌재가 기각할 수는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일단 신문법과 관련하여 헌재는 심의·표결권 침해 여부에 대해 7:2로 위법 결론을 내렸다. 대리투표와 관련해서는 9명 중 8명이 대리투표를 인정했다. 미디어법 강행 처리 뒤 정치권에서 진실 게임 양상으로까지 번지며 뜨거운 논쟁거리가 됐던 대리투표는 사실로 인정된 것이다. 이강국 헌재소장 등 재판관 5명은 방송사 화면 등을 살펴본 결과 목적만 달랐을 뿐 여야 의원들이 모두 대리투표를 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정상적 표결이라면 나올 수 없는 이례적인 전자투표 로그 기록 등에 비춰봤을 때 신문법 표결은 공정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고 헌법상 다수결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헌재는 법률 개정안의 절차상 문제가 적지 않은데도 6:3으로 법안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국회 입법 절차상의 하자를 하나하나 문제 삼아 그때마다 법안을 무효로 한다면 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강국·이공현 재판관 등은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권한 침해만 확인하고 이로 인한 위법 상태 시정은 국회의장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무효확인청구를 기각했다. 즉, 헌재는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번 권한쟁의 심판에서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에 머무른 것이다. 방송법과 관련해 헌재는 심의·표결권 침해 여부는 6:3로 위법 결론을 내렸다. 방송법 첫 표결 시도 때 의사 정족수 부족으로 표결이 무산되자 국회 부의장이 재투표에 부쳐 가결한 것을 놓고는 5:4의 아슬아슬한 표차로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다는 결정을 내놨다. 조대현 재판관 등 다수는 표결이 끝난 상태에서 과반수가 출석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다시 표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부결이 확정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강국 소장 등 나머지 4명은 과거 국회의 실무 관행 등에 비춰봤을 때 의결 정족수에 미달한 국회의 의결은 유효하게 성립된 것이 아니어서 재표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대 의견을 냈다. 헌재는 방송법의 경우 신문법과 같이 법률 개정안의 절차상 문제가 적지 않은데도 7:2로 무효확인청구를 기각했다. 심의·표결권 침해 여부와 관련해 일부 위법성이 있었다고 판단한 김종대 재판관은 신문법과 마찬가지로 “법률 제정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의장의 권한쟁의 심판에서는 헌재가 심의·표결권 침해 여부만 판단하고 가결 선포 행위의 효력에 대한 사후 조치는 국회의 자율적 의사결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조대현 재판관은 “질의·토론 절차가 생략된 점 외에도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무효확인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강국 소장을 비롯한 나머지 재판관들은 “법안 가결 선포 행위가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국회법 92조를 위반했지만 입법 절차에 관한 헌법 규정을 위반하는 등 선포 행위를 취소, 무효로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처럼 헌재가 야당 의원들에 대한 권한 침해를 인정하면서도 미디어법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는 일견 모순되는 결정을 내린 것을 정치권에서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고 동시에 국회의 자율성을 존중한 데서 나온 결론”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일각에서는 헌재의 평균 사건처리 기간이 587일인데 이번 판결이 정확히 100일 만에 결정이 났다는 점을 들어 헌재가 문제점만 적시하고 사후 조치를 국회에 떠넘겼다고 주장한다. 결정이 지연될 경우 혼란이 확산되면서 국가 정책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려해 판결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이렇듯 헌재가 일견 정치적 성격을 띠는 절충안을 냄에 따라 공은 다시 정치권으로 넘어가게 됐다. 개정된 방송법·신문법·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사업법(IPTV)은 헌재에 의해 법적 유효성이 인정됐기 때문에 예정대로 11월 1일부터 시행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절차상 침해 행위를 헌재가 인정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여야 사이에 새롭게 힘겨루기가 진행될 수도 있다. 헌재 판단 놓고 정치권 각기 다른 ‘해석’ 그러나 헌재의 결정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한나라당은 “헌재가 미디어법의 유효성을 인정했으므로 추가로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는 반응이다. 야당의 재논의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민주당 등 야권은 “헌재의 판결은 다시 국회에서 자율적 의사결정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므로 미디어법을 원점에서 재협상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10월 30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민주당은 (미디어법 통과가) 정치적 판단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제 소모적인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폭력으로 입법권을 방해했고 이번엔 맘에 안 드는 판결이라며 불복종하고 있다”며 “앞으로 미디어 산업 발전에 대해 민주당의 어떠한 요구에도 논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장광근 사무총장은 “(야당의 반발은) 여당과 대통령이 하는 일은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는 놀부 심보”라며 “이번 선거 결과가 현 정권의 발목잡기 면허장을 받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정훈 원내수석부대표도 “민주당은 국가적 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며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댈 것”을 요구했다. 반면, 야당 측은 헌재의 판결을 ‘정치적 판결’로 규정 지으며 향후 계속 논의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은 앞으로 미디어법 개정 또는 무효화를 위해 원내외 투쟁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전략기획본부장 전병헌 의원은 이날 “헌재의 판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심의·표결의 침해가 ‘있느냐 없느냐’만 확인했고 위법 상태의 시정은 국회의장에게 맡기겠다는 결론을 읽을 수 있다”며 “여야가 정치적 협의로 심의·표결권 침해에 대한 입법적인 부분을 처리하라는 취지”라고 해석했다. 전 의원은 “한나라당은 끝났다고 만세를 부르는데, 이런 헌재의 취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미디어법에 대해 다시 협상해야 한다”면서 “권리가 침해된 상태로 불법적인 상황 속에서 처리된 미디어법을 무효화시키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이날 확대간부회의에서 “미디어법의 전면적 재논의가 필요하다. 절차상의 위법을 해소하지 않으면 이 법은 집행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국민의 정서이자 법리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개정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를 위해 이날 박주선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한 ‘무효 언론악법 폐지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무효 언론악법 폐지투쟁위원회는 박주선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기로 했으며, 간사에는 전병헌 의원, 김부겸·변재일·서갑원·장세환·조영택·천정배·최문순 의원 등 문방위원이 참여한다. 박주선 위원장은 회의 후 모두발언을 통해 “헌재가 결정 선고를 내리며 판시 이유에서 신문·방송법 국회 통과 과정에서 중대한 위법 행위가 있다고 인정했으며, 통과된 법안을 무효화해 달라는 주문에 대해서는 권력분립의 원칙과 국회의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청구 기각이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판시 이유와 주문이 불합리하고 불일치하다”면서 “폐지 개정안을 신속히 내는 등 대책을 수립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디어법 일지 2009년 2월 25일 한나라당, 방송법 등 미디어법 기습 상정/ 민주당, 전 상임위원회에 대해 보이콧 선언 2009년 2월 26일 언론노조, 언론악법 강행처리 반발 총파업 돌입 2009년 3월 2일 여야, 미디어법 협상 통해 6월 표결 처리하기로 전격 합의 2009년 7월 여야, 미디어법 처리 놓고 갈등 2009년 7월 21일 여야, 미디어법 관련 협상 최종 결렬 2009년 7월 22일 이윤성 국회 부의장, 미디어법 직권상정 뒤 표결처리 강행. 방송법 처리과정에서 의결 정족수 미달로 재투표 선언, 이후 미디어법 관련 전 개정안 통과 2009년 7월 23일 민주당 등 야 3당, 헌법재판소에 미디어법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및 국회의장에 대해 권한쟁의 심판 청구 2009년 7월 25일 민주당, 미디어법 무효 주장 ‘장외투쟁’ 돌입 2009년 9월 10일 헌법재판소, 미디어법 1차 공개변론 2009년 9월 22일 헌법재판소, 미디어법 영상물 검증 실시 2009년 9월 29일 헌법재판소, 미디어법 2차 공개변론 2009년 10월 29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미디어법 관련 최종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