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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사람잡는 돌 허방

물길 살린다며 도보 한복판에 50cm 깊이 도랑 만들어
하루 10여명 발 빠져 부상…주민·상인들 “불안해 못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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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43호 박성훈⁄ 2009.11.10 11:19:19

서울 혜화동 대학로. 수많은 공연장·음식점·주점이 몰려 있어 들뜬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거리다. 그런데 최근 이 대학로 보도에 ‘돌로 만든 허방’이 설치됐다. 아무런 위험 표시 없이 도보를 따라 길게 깊이 50cm의 각진 돌 도랑이 파인 것이다. ‘도심 실개천 만들기’ 사업의 첫 작품으로 물길이 흐르는 거리를 만드는 디자인 사업이다. 하루 10명 이상 넘어지고, 부상으로 119 출동도 지극히 조심스럽게 이 길을 차분히 걷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젊은이들, 대학로를 오랜만에 찾은 사람들에게 이 물길은 바로 흉기일 수 있다. 주변에 상주하는 이들에 따르면, 11월 1일 실개천 완공 이후 하루에 10명도 넘는 사람이 실개천에 발이 빠지면서 넘어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위험한 지역은 횡단보도 앞 부분이다. 건너편에서 실개천이 있는 줄 모르고 길을 건너오던 사람이 앞만 보며 진행하면 바로 50cm 깊이 아래로 발이 빠지는 것이다. 발이 빠지면서 무릎이 깨지거나 정강이를 다치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119 구급차가 출동하는 대형사고도 벌써 두 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한 할아버지는 크게 넘어지면서 발목이 돌아가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 목격자는 전했다. 이 돌 도랑이 더 위험해지는 것은 밤 시간이다. 근처 유흥가에서 한 잔 마신 취객이 빠지기 때문이다. 주변 상인·시민 “불안해서 못 살겠다” 위험천만한 상황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면서 주변 상인들과 행인들은 “도시 디자인도 좋지만 이렇게 안전을 무시해도 되는 것이냐”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돌 도랑 옆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하는 40대 남자 상인은 “건너편에서 길을 뛰어 건너오는 사람을 보면 내 가슴이 철렁한다”며 “아래를 보지 않고 달리면 바로 발이 빠지면서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옆 40대 중반 여자 상인도 “하루에도 몇 번씩 코앞에서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지니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털어놓았다. 떡볶이를 파는 노점상은 “휘황찬란한 주변 상가들을 보면서 걷다가 도랑에 빠지는 사람을 하루 한두 명씩은 꼭 본다”며 “술 취한 사람이나 시각장애인이 지나가다 대형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길을 걷던 70대 노인은 “종로구 인사동에서 길바닥에 설치된 조형물에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며 “시민들을 이렇게 위험에 빠지게 해도 되느냐”고 혀를 찼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대학로에 왔다는 40대 재미 동포는 “만약 미국에 이런 위험한 시설물이 시민의 동의도 받지 않고 생긴다면 바로 주민들이 행정기관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벌여 엄청난 손해배상을 안길 것”이라며 “겉멋만 생각하고 시민 안전은 생각 않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정말 놀랍다”고 말했다. 이 돌 도랑은 북악산에서 성균관을 지나 대학로로 흐르던 옛 홍덕동천의 물길을 재현하기 위해 설치됐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 사거리까지 총 1030m 구간에 홍덕동천을 되살린다는 사업이다. 통행인이 가장 많은 혜화 로터리~마로니에 공원 500m 구간은 돌 도랑에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보도 한가운데 설치됐다. 발이 빠지는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지하철 2호선 혜화역 1번 출구 앞길. 보도 한가운데 도랑이 너비 50cm, 깊이 50cm 정도로 길게 설치됐다. 돌 도랑 위엔 드문드문 플라스틱 덮개가 있을 뿐 발이 빠지는 것을 막을 만한 안전시설은 없다. 땅 쪽을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발이 빠지기 십상이다. 의료사고 전문 서상수 변호사는 이 시설물에 대해 “지자체는 관내에 시설물을 설치할 때 주민들의 안전 방안을 강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시설물에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시·종로구, 안전성 문제 묵인 서울시와 사업 주체인 종로구는 대학로 홍덕동천 디자인을 추진하면서 안전사고의 가능성을 모르지 않았다. 설계·시공 과정에서 안전성 문제에 대한 의견이 나왔지만, 구청의 설계 의도를 존중해 공사를 진행시켰다는 것이 서울시 관계자의 말이다. 이에 대해 관할 종로구의 실개천 사업 관계자는 “서울시의 점검 과정에서 실개천을 안전시설 없이 도보에 바로 설치하면 안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으며 설계에 대한 서울시 심의에서도 그 문제가 지적됐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현장 점검을 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설계 내용에 대한 구청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했다. 그래서 조성을 지켜보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사 막바지에 실개천이 조성되고 보니 동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안전 문제가 지적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 즉 ‘다치는지 안 다치는지 두고 보자’는 무사안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됐음을 알려주는 발언들이다. 종로구·서울시·시공사 “조만간 위험요소 없앨 것” 사고가 잇달자 종로구는 서울시·시공사와 함께 현장 점검을 벌여 위험 요소를 제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종로구 관계자는 “서울시와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어떤 형태로 보완할지 결제를 받으면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보행에 지장이 있을 수 있지만 미관을 보존하기 위해 완전 복개보다는 물길이 보이도록 안전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조성될 물길 복원공사에서는 시민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거리에 물길을 조성하는 사업은 대학로가 끝이 아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서울 도심에 120여 개의 실개천을 만들 계획이다. 11월 중에 성동구 뚝섬역 부근(길이 280m)과 성북구 국민대 주변(120m), 송파구 남부순환로(1500m)에 잇달아 실개천이 조성되며, 내년 6월에는 구로구 거리공원에도 360m짜리 실개천을 선보인다. 서울시 외관을 뜯어고치겠다는 ‘디자인 서울’ 사업이 열띠게 진행되고 있지만, 대학로 실개천 사업처럼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와도 아랑곳 않고 진행되는 또 다른 사례는 없는지 시민은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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