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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길에서 태어난 아이

“버리고 버림받는 사회에서 나도 ‘길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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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2호 편집팀⁄ 2010.03.22 15:56:11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오늘은 마음이 아픈 날이다. 지난 설부터 쌀을 나누고 말벗이 되어드리기 위해 방문해왔던 어느 독거노인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되어 외부와 교류를 끊고 이웃들과의 대화마저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할머니의 닫혀버린 마음 문을 열고자,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할머니 댁을 다시 방문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할머니는 현관문도 마음의 문도 끝내 열어주지 않으셨다. 대개 독거노인들은 낯선 손님이 와도 말벗이 그리워 반가워하지만, 사회의 보호와 사랑으로부터 오랫동안 단절되어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이 깊어진 노인들 중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아예 끊어버린 채 홀로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음의 병이 중증에 달한 것이다. 그동안 할머니를 방문하면서 더 많은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사랑에 머물러,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보니,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해야 할 때임에도, 이웃을 대할 때, 사람을 대할 때 늘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결국, 할머니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부족한 사랑이나마 최대한 담아 인사말을 적은 카드를 문고리에 남기고 왔다. 마침 가방 안에 카드가 있었던 까닭은, 늘 편지 또는 카드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몇 푼의 돈만을 쥐어주기에는 늘 아쉬움과 민망함이 있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말을 걸고 도움을 줄까 망설이다가 말을 걸기 어려워 그냥 놓쳐버린 경험이 너무나 많아, 그 이후로는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간단한 메시지로 남기거나 연락처를 남길 수 있는 준비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할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풍선에 편지를 달아 날려 보내는 이들의 모습을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오늘 그들의 모습이 잠시 생각났다. 사실 그들의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일을 떠올리며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념을 떠나서, 그 일의 효과를 떠나서, 그들에게는 그게 사랑인 것이다. 내가 오늘 할머니에게 편지라도 남기지 못하면 견딜 수 없겠는 것처럼, 지하철 안의 누군가를 위해 카드라도 남기지 못하면 하루 종일 후회되고 슬픔이 밀려오는 것처럼, 그들은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랑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놓는 까닭은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주위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많다. 특히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김길태’라는 범죄자의 ‘이름’이 한 주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자를 불쌍히 여기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게 되겠지만,(그리고 난 그의 죄를 지극히 미워하지만,) 난 ‘김길태’라는 그의 ‘이름’이 가엽고 불쌍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이름의 ‘길태’. 길태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 의해 버려져 길에서 발견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길에서 태어난 ‘길태’라는 아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검거 후에 쏟아지는 시민들과 네티즌들의 욕과 비난은 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넘어 무서우리만치 또 하나의 폭력으로 느껴지기까지 했고, 그의 지난 세월을 유추하게끔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분노를 억누르며, 죄를 짓고 살아가며, 비난의 시선은 늘 남을 향하였고, 사랑은 늘 나 자신만을 향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외된 한 사람이 겪었을 외로움은 비정상적인 충동을 낳고, 그가 겪었을 질타와 멸시의 시선은 분노를 낳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흉악한 괴물이 되어버렸고, 정말 말할 수 없이 불쌍한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길에 버려진 ‘길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또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서로 유기되고 또 서로를 유기한 채,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이웃과의 사랑이 단절된 가운데서도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상처로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버려지는 아이들이 한 해 만 명을 넘고, 하루 30명에 이른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나,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북한의 어린 꽃제비(노숙인)들이나, 길에서 태어나 유치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김길태나, 버림받은 독거노인이나, 모두가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사실, ‘김길태’라는 이름을 생각하며, 성경에 자주 나오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익히 들어 알 수 있는 한 인물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길태와 비슷한 이름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인물이다. ‘길태’가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의 이름이라면, ‘모세’는 ‘강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길가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어 양부모에게는 길에서 태어난 아이로 불리며 자라난 길태처럼, 갓난 아이 모세 역시 나일강의 하수에 버려져 이방 땅의 양부모가 건져 올릴 때까지 검고 좁은 갈대 상자 속에서 홀로 울고 있어야 했다. 길태가 중학교 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양어머니에게 ‘나는 어디서 왔어?’ 하고 늘 물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듯이, 동족들이 고통받을 때 모세는 히브리인이면서도 이집트 땅에서 호의호식하는 데 대해 죄책감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길태가 범죄자로 낙인찍혀 도망자의 생활을 해야했듯이, 물에서 건져 올린 모세 역시 범죄자로 낙인찍혀 도망자의 생활을 하며 극도의 외로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말로는 너무나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길태는 죄와 아픔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기징역 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말로를 걸어가게 되었지만, 모세는 한 민족의 운명을 바꾼 영웅이 되었다. 어둠과 아픔 가운데서 길태가 사랑을 경험하거나 깨닫지 못한 반면에, 모세에게는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톨이로서 은둔생활을 하는 길태에게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는 이웃이 아마도 없거나 그 사랑이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에는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하나가 사랑이다)”라는 성경 구절처럼, 사랑을 체험하고 깊은 사랑과 친구처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 사랑이 모세를 만들고, 그 사랑 없음이 길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람들이다. 나에게 사랑이 있는가. 이웃을 보며, 나라를 보며, 또는 먼 나라의 불행한 이웃들을 보며, 아파할 수 있는 사랑을 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또 다른 길태를 만들어내거나, 스스로가 또 다른 길태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수많은 길태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멸시 혹은 무관심을 던져주고 있는가. 서로가 버리고 서로에게 버림받는 이 세상 가운데서, 먼저 우리 스스로 사랑을 깊이 경험하자. 겉보기에 품위를 갖추고, 법도 잘 지키고, 남 보기에 괜찮은 사람처럼 비치더라도, 이웃을 향한, 사람을 향한 사랑과 눈물이 없었다면, 이제 허례허식은 버리고 나의 상태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스스로 길태(길에서 태어난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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