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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에서 악기 부쉈으면 연주한 건가, 안 한 건가?

멀티미디어 아트의 중심에는 플럭서스 실험개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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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3호 편집팀⁄ 2010.03.29 14:04:51

진선희 (독립 큐레이터) 플럭서스(Fluxus)는 라틴어 Flux(흐름) 어원에서 나온 말로, 60년대의 대표적 국제 예술운동의 이름이다. 플럭서스를 내건 예술가들은 50년대 말 다다(Dada)의 실험정신에 강한 영향을 받는 문학가, 음악가 그리고 화가 등등의 젊은 예술가들로, 학파나 학원 또는 단원을 통해 계열적이며 획일적으로 형성되는 정체된 예술기관이나 작품개념을 타파하고 탈피하고자 했다. 1961년 조지 마키우나스 (George Maciunas)가 플럭서스라는 이름을 명명했으며 이듬해 독일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최신 음악 국제축제(Fluxus Internationale Festispiele neuester Musik)’라는 첫 번째 공연을 주도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 예술운동은 존 케이지(John Cage)가 지향한 무형식(최소한의 악보나 예행 연습이 전혀 없는) 음악에 불교의 선(Zen·우연성에 기인한 우주적 조화) 사상을 융합시켜, 인간의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일상성과 생활을 예술적인 표현으로 발현시킨다. 플럭서스 운동은 주로 전위적인 퍼포먼스 공연을 통해 갖가지의 오브제(소품)들이 제각기 본질 특유의 음역을 가지고 있으며 그 요소 자체는 이 세계에 있어 하나의 고유한 악기임을 강조한다. 피아노 공연 내내 침묵하며 때로는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를 부숴버리기도 한다. 또한 바이올린을 밧줄에 동여매어 동네 거리에서 한나절 끌고 다닌다. 관객의 넥타이를 갑자기 잘라 버리고 TV 모니터 앞에서 굿판을 벌이다가도 시민들과 노닥거린다. 이러한 행위는 묵중한 예술 형태에서 한줄기 폭포수처럼 한순간 공기를 틔어 놓는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대중들이 그들의 공연을 통해 인생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예술에 함께 흡수되기를 바랐다. 상업적인 예술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배제했다. 그러한 그들의 개혁적인 예술적 선동은 대중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예술 그 자체일 수 있으며 인생은 총체적인 예술처럼 이해 될 수 있음을 자각시키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공연은 예술의 미래 향한 실험 플럭서스 공연의 특징적인 요소는 관객에게 예상된 결과나 효과를 줄 만한 주된 요인들은 더 이상 어떠한 효력이 없으며 차라리 무질서적인 카오스가 현실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행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면 공연 무대의 바이올린과 연주자의 출연은 관객에게 연주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그의 공연에서 나타나 연주를 하지 않고 악기를 부숴버렸다. 관객은 악기를 부수지 말라고 소리쳤고 다른 한쪽은 공연을 중단시키지 말라고 대립하면서 관객의 해프닝으로 공연은 전이되고 확장됐다.

공연은 또 다른 예술과 사회일상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 이는 이튿날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됐다. 플럭서스 공연은 이처럼 구성 있게 짜여 있는 기술적 기계음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적 표현도 아닌, 심리적이며 예민한 감수성의 흐름만이 공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내용물이자 아이디어로서, 어떠한 매개체를 통하거나 예견되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그들의 표현방식과 열정 그리고 혁신성은 예술을 변화시키겠다는 전제로, 미래를 향한 실험적 요구였다. 앞으로 20년간 그들의 유토피아적, 실험적 공연은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퍼포먼스를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젊은 예술가들은 비단 전무후무한 그들만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관객을 예술 공연 안으로 끌어들이고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이 예술 영역을 얼마나 폭넓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됐고 인터랙티브(상호작용)를 통한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플럭서스 예술가들로는 요셉 보이스, 백남준, 딕 히긴스(Dick Higgines), 울프 보스텔(Wolf Vostell),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라몬 영(La Monte Young), 샬롯 무어맨(Sharlotte Moorman) 등이 있으며 요셉 보이스의 행위예술과 백남준의 설치 비디오 아트, 그리고 실험음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대예술에 있어 복합매체(Intermedia)의 장을 열어준 예술 사조로 손꼽힌다. 특히 이때 작가들은 대중적으로 보급화된 일상품인 TV모니터와 비디오를 예술적 매체로 가져다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개념적으로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을 뿐만 아니라 전기나 테크놀로지적인 기계·산업 재료들을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이 이용 또는 변형하며 새로운 예술적 재료로 쓸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플럭서스 운동은 비디오 아트의 모태로 예술 영역에 있어 전적으로 새로운 전자매체를 이용한 독립적인 비디오아트로 계승된다. 이후 비디오 아트는 팝 아트(Pop Art)와 맞물려 7~80년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꽃피운다. 그리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오늘날의 멀티미디어 아트의 전개를 불러온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항상 플럭서스의 실험적 개념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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