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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소통하는 리더십’이 바로 선진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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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76호 최영태⁄ 2010.06.28 16:16:58

최영태 편집국장 중앙일보 6월 24일자는 1면 톱으로 한국 팀을 16강으로 이끈 박지성의 ‘비움의 리더십’을 다뤘다. 이 기사를 보니 2002년 히딩크 감독 당시의 일화도 생각난다. 히딩크가 보기에 당시 국가대표팀의 선후배 관계는 너무 엄격했고, 그래서 히딩크는 “지금부터 무조건 반말”을 지시했다. 김남일이 홍명보 주장에게 “명보야,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주장 박지성은 아르헨티나에게 대패한 다음날 굳어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후배들에게 농담을 건네 분위기를 바꿨다고 한다. 박주영은 박지성에 대해 “형은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스스럼없이 대해준다”고 말했다. 2002년과 2010년의 이 두 일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히딩크나 박지성이 하는 방식이 바로 ‘서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박지성은 오랜 영국 생활을 통해 익혔을 것이다. 서양식 상하관계를 많은 한국인이 오해하지만, 존댓말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이른바 ‘야자 타임’ 식은 아니다. 윗사람은 지시하고 아랫사람은 따르는 상명하복이 서양에도 있지만, 그 근본에는 합리주의·원칙이라는 게 있다. 이런 원칙만 지켜지면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친구처럼 지내도 좋다는 게 서양식이다. 물론 한국식, 즉 ‘윗사람은 책임감을 느끼며 찍어 누르고, 아랫사람은 입 닥치고 무조건 복종하는’ 방식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때로 이런 방식은 엄청난 돌파력을 자랑한다. 한국인이 잘하는 ‘돌관 공사’(1년 걸릴 공사를 단 몇 개월에 해치우는)는 한국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 경제든, 운동이든, 옛날식으로 ‘선수들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대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 나갈 수 없다. 특히 스포츠는 ‘재미있고 진지하게 논다’는 유희성이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지난 월드컵들에서 수없이 고배를 마실 때 어떤 외국인 비평가는 “한국 선수들이 ‘국민의 과도한 기대감’이라는 중압감 없이 가뿐하게 뛸 수 있다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생각해보자. 온 국민의 시선이 당신의 발을 쳐다보고 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없이 비난이 쏟아질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라면 발이 얼어붙지 않겠는가를. 지난 동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앞두고 미국인 해설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연아가 한국인의 기대에 못 미치면 그녀는 한국인에게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이런 중압감을 그녀가 다행히 이겨냈고, 이번 축구 국가대표팀도 국내에서 온갖 말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선전을 펼치고 있다. 과거에 비한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엄청난 기대감’이라는 괴물에 더 잘 저항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분명히 관계가 있다. 민주화 덕분에 아무리 큰 중압감 아래서도 “나는 나만 원칙에 맞게 열심히 하면 돼”라며 자기를 다독거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고나 할까. 적당한 기대는 선수를 분발시키지만, 과도한 기대는 사람을 얼린다. 일이든 운동이든 적당히 기대하며 즐기는 선진 방식을 배우도록 우리도 노력해보자. 주눅들지 않고 일하는 사회가 바로 선진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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