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성희롱·성추행·성폭행…. 요즘 언론 지상을 뒤덮고 있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호순·조두순·김길태·김수철 등 희대의 성범죄자들을 다 잡아 넣었는데, 어떻게 또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나?”라고 의아해하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성추행·성희롱을 걱정하더니, 급기야 여당 국회의원이 여대생을 앞에 앉혀놓고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해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사태를 바라보면서 필자는 세상을 개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가 제 길을 잡아가기 시작하는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썩은 환부에 비로소 조명이 비춰지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언론 지상에 가끔 연도별 암 환자 숫자가 보도된다. ‘유방암 환자, 10년 전의 5배’ 같은 기사다. 이런 기사를 보면 쉽게 ‘도대체 환경오염이 얼마나 심해졌기에 암 환자가 5배나 늘어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다르다. 과거 조기검진이 없을 땐 암이 심각해진 다음에야 발병 사실을 알았지만, 요즘은 유방 촬영 등으로 조기에 암을 잡아내기에 유방암 환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유방암 환자가 늘어났다고 우울해할 게 아니라, 조기에 발견했으니 기뻐해야 한다는 게 정답이다. 한국 사회의 성추행·성폭행도 마찬가지다. 성폭행·성희롱을 모르던 한국 남자들이 갑자기 팔을 걷어붙이고 못된 짓에 나서고 있는 게 아니다. 여성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성폭행·성추행이 적극적으로 신고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건 성폭행·성추행이 많다는 게 아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흉악 범죄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라는 점이다. 서구 선진국에서 성폭행·아동폭력·가정폭력 같은 파렴치 범행은 중범죄로 처벌받는다. 한국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가정폭력·성폭행 같은 흉악범죄가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가끔 한국 TV에서 방송되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집 안에서 때리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상담위원들’은 아들을 설득하느라고 바쁘다. 비슷한 상황이 미국에서 일어났고, TV 카메라에 찍혔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에 ‘인생 쫑’이다. 흉악범에게 설득이 말이 되나! 한국 사회는 가정폭력범이나 성폭행범을 ‘보호’한다. 성추행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기업인 중 인생이 끝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세상을 놀래킨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국회의원이 다음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또 당선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성추행 사태는 왜 끊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한국에서 우둔한 질문일 뿐이다. 이렇게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느슨한 사회에서,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정치인이 몸조심을 할 필요는 그리 크지 않다. 이제 좀 그만 봐주자. 처벌이란 ‘범죄를 한 사람의 사정을 참작해’ 내리는 게 아니다. 처벌의 기준은 ‘당한 사람의 고통’이 돼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가정폭력·성폭행 등이 엄벌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다. 최근 부쩍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환부에 날카로운 칼날이 가해지길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