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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 클로드 드뷔시

애정의 도피 행각 끝 생애 최고작 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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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07-208호 편집팀⁄ 2011.01.31 14:30:06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드뷔시(Claude Debussy)는 베를리오즈, 비제와 함께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며,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시 ‘바다(La Mer)’는 바그너와 차이코프스키 등의 19세기 말의 신낭만주의 음악을 탈퇴한 무음조(Atonal) 음악이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음악이 된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은 1894년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다. 베토벤이 ‘교향곡 3번’을 작곡하면서 고전주의 시대 음악을 넘어서 낭만주의 음악의 동을 틔운 것처럼, 드뷔시는 20세기 ‘현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린 사람이다. 그는 1903년 프랑스 나폴레옹이 제정한 최고의 훈장(Chevalier de La Legion d'honneur)을 수상했으며, 문화 강국 프랑스의 음악적 자존심을 살린 사람이다. 상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드뷔시는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다. 뛰어난 재능이 인정돼 그는 열 살 때 파리 음악원의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이후 11년 동안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원의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음악 교육을 싫어했으며 불협화음(Dissonance)을 좋아했다. 교수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조르주 비제처럼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베토벤, 슈만, 쇼팽의 음악을 훌륭히 연주해 피아니스트로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드뷔시는 1880년부터 188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한 나데츠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의 자녀들을 위한 음악교사로 일했지만, 차이코프스키와의 교류는 없었다. 1884년에 그는 ‘방탕한 아들(L'Enfant Prodigue)’을 작곡하면서 로마 대상(GrandPrix de Rome)을 수상했고, 이후 4년간 로마에 살면서 세계를 여행하고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가 원하는 전통적 음악을 떠나 자유로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칸타타(Ode a la france)’ ‘쥘레이마(Zuleima)’ ‘봄(Printemps)’ ‘피아노(Fantaisie)’는 아카데미로부터 “괴상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888~1889년경 드뷔시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지만, 바그너 같은 방대한 음악 대신 소규모의 음악을 작곡했다. 1890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곡 가운데 하나인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 달빛(Clair de Lune-Suite Bergamasque)’의 일부를 발표했다. 1902년에는 10년의 노력 끝에 그의 유일한 오페라 ‘부수 음악과 조곡(Pellias et Melisande)’이 초연돼 대인기작이 됐고, 모리스 라벨과 다른 프랑스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3~1905년에는 교향시 ‘바다(La Mer)’를 발표했는데 이 음악이 바로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러나 드뷔시는 “나는 단지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 싶을 뿐이다” “인상주의 운운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면서 이 명칭을 반대했다.

미술 세계에서 인상주의는 그 윤곽이 뚜렷하지만 음악에서는 그렇지는 않다. 인상주의 음악은 낭만주의 음악처럼 강한 감성을 나타내거나, 프로그램 음악처럼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는 게 아니라, 암시를 주거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음악으로 볼 수 있다. “교향시 ‘바다’를 들으면서 바다를 볼 수 없다”라고 한 음악평론가도 있지만 드뷔시는 “음악은 영상이 아니라 마법의 예술이다”라고 답했다. 드뷔시는 종종 지휘도 하고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후기에는 ‘피아노곡-Etudes’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와 발레 음악 ‘놀이(Jeux)’를 작곡했다.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그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답변하며 “음악은 영상 아니라 마법”이라고 주장. 그는 바그너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와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뷔시의 ‘페리아스와 멜리장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음악 세계 외에도 1885년 프랑스 상징주의파의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상징주의파는 시와 시각예술, 극장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자신들만의 음악세계를 만드는 데 이런 요소들을 활용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유부녀 바니에 부인을 8년간 사랑했다. 로마로 떠난 뒤 그녀와 헤어지고 로마에서 돌아온 후 가브리엘 듀퐁과 9년간의 평탄치 않은 동거 생활을 했다. 그 뒤에는 릴리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친구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했다. 이후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 바르닥 부인과 바람을 피우다 텍시에가 파리의 유명한 콩코르드 광장에서 권총자살을 시도하는 스캔들이 일어났다. 바르닥 부인과 드뷔시는 런던으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유명한 ‘바다’를 완성시켰다.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그곳에서 그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인 ‘바다’를 완성한 것이다. 굴곡 많은 삶을 뒤로하고 드뷔시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리가 전쟁 위협에 빠졌을 때, 직장암으로 사망했으며, 파리의 파씨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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