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지난 2월13일 18세 청년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피자 배달을 하다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버스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30분 배달’을 판촉 포인트로 삼았던 피자 업체에 비난이 쏠렸고, 코너에 몰린 일부 피자 업체는 이에 “30분 배달제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뒤늦었지만 올바른 조치라는 칭찬을 받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 18세 청년의 한 많은 죽음(사망 며칠 뒤에 대학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는)에 책임져야 할, 또는 반성해야 할 당사자는 피자 회사 한 곳뿐일까? 아니다. 분명 더 있다. 우선 버스. 신호등을 위반하고 달린 버스는 책임이 없나? 신호등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시적으로 신호위반을 하며 달리는 한국의 버스들은 이 청년의 죽음에 아무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나? 이 청년의 죽음이야 ‘피자 배달’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언론의 보도로 이어졌고, ‘피자 30분 이내 배달’이라는 우리 사회의 해악 한 가지가 없어지는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 사건 이외에 하루에도 대한민국 전국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을 ‘버스의 신호등 위반’에 의한 사망 또는 부상을 당하는 사람의 절망과 원한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사과 또는 보상을 받아야 하나? 신호를 위반한 버스에 치어 목숨 또는 신체 일부를 잃는 사람들의 억울한 행렬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나? 미국처럼 신호등이 잘 지켜지는 나라에서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30분 안 배달이라는 죽음의 과제를 떠맡긴 피자 업체뿐 아니라 신호등을 어긴 버스 업체 또는 운전사에게도 당연히 비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버스의 신호등 위반은 이미 상식이 된 탓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또 다른 주요 당사자가 있다. 바로 한국 사회 또는 경제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모든 청년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배달 오토바이는 곡예 운전을 일삼는다. “빠라바라방~”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교차로를 침범하는 배달 오토바이들을 보면 우선 화가 치민다. “도대체 얼마나 돈을 번다고 저렇게 목숨을 내놓는 난폭 운전을 하나?”는 짜증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면 저렇게 자포자기 운전을 할까”라는 측은한 마음이다. 그들의 난폭운전에서는 이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분노가 펄펄 묻어난다. 젊은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만 할 뿐, 빠져나올 구멍은커녕 손에 잡히지는 않을지언정 아주 멀리서라도 어렴풋이 비치는 탈출의 낌새조차도 주지 않는 이 매몰찬 사회에 대해 ‘오토바이 청소년’들은 온몸으로 항거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오토바이 사망-부상 사건이 줄잇고 있건만, 이 사회에 반성의 기미는 적다. 피자 배달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는 분명 여러 당사자들의 지문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반성한 당사자는, 그것도 사건 직후가 아니라 사건 뒤 여러 날짜가 지나면서 압력에 못 이겨 반성한 당사자는 딱 하나, 피자 업체뿐이다. 나머지 당사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다. 무서운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