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최근 내 눈을 의심케 하는 통계수치가 발표되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0년 한 해, 존속(尊屬)살인이 평균 5.5일에 한 번 꼴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전체 살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9년 4.2%, 2010년 5.3%여서, 2009년 당시 미국 2%, 프랑스 2.8%, 영국 1%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였다. 재산이나 보험금을 노린 사건부터 연애, 혼수, 이사, 취업 등과 관련된 좀 더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존속살인의 동기가 되고 있다.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륜을 끊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북한이탈 주민 지원 활동을 하면서 북한에서 식량이 없어 부모자식과 형제 사이에 살인을 하고 그 인육을 먹었다는 소식을 종종 듣기도 했는데 처음에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절대 거짓말이겠지”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많이 기울었다.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은 한 인간이 정신분열을 일으키게끔 하기에 충분하고, 정신을 잃은 사람의 눈에는 가족이 가족으로 보이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존속살인이 북한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북한처럼 굶주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신분열과 잘못된 가정교육이 존속살인의 원인 실제로 전문가들은 정신분열증과 잘못된 가정교육을 존속살인의 원인으로 꼽는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현대에 만연해진 정신적 병폐의 원인을 일제 치하 35년에 이어 급속히 이루어진 천민자본주의에서 찾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구도 속에서 현대인들은 언제나 상대적인 경제적 궁핍을 호소하게 되었고, 그렇게 물질과 자본을 맹목적으로 축적하고, 사회라는 전장에서 싸워 피투성이로 살아남게 되었을 때, 어느새 기러기 아빠가 되어 버리고, 어느덧 부모의 욕구를 대신 채워줄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는 허망함 가운데 현대인들은 경제적 궁핍뿐 아니라, 마음의 궁핍, 마음의 굶주림을 호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굶주림이 이성을 잃게 하여, 존속살인과 식육이 발생하는 북한 사회의 병폐가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적 굶주림으로 인해 존속살인과 가족해체가 일어나는 병폐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문가들은 정신분열의 원인을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 잘못된 자녀 양육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종종 상담하며 대개 병의 원인이 가정에 있음을 확인했다.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자면, 대개의 환자들은 가정 안에서 외로운 가운데서 병을 발전시켜 왔다. 가정은 자녀가 사랑으로 양육돼야 할 교육의 가장 기본적 단위다. 그러나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부패구조와 왜곡된 의식구조 속에서 경쟁에서 이긴 승자든, 경쟁에서 낙오된 패자든, 누구나 자신의 자녀만큼은 승자로 만들려고 비인격적 양육을 자행하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가정교육은 반드시 바로서야 한다. 우리만큼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민족이 유대민족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가정교육을 살펴보면 우리네와 다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지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종교교육을 통해 전인교육을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 교육, 즉 사상과 학문 교육의 근본 지침은 ‘쉐마(Shema)’에서 시작되므로 국내에서도 학부모들 사이에 쉐마 교육 열풍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필자는 교육전문가가 아니라 쉐마 교육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나 비천한 성경 지식에 따르면 부모의 교육열 때문에 ‘쉐마’의 뜻마저 많이 왜곡되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유대교의 율법은 원래 수평전파 아닌 수직교육의 대상 ‘쉐마’의 원 뜻은 신명기서 6:4의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의 첫 글자인 ‘들으라(Hear, 쉐마)’란 히브리어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순종하다(obey)’란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하라”는 그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겨져 있다. 유대인은 거룩함을 꿈꾸던 민족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늘 지켜 행하려 했으며, 때로 주변 민족들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신명기서는 그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생활할 때의 이야기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고 별처럼 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당시에는 이 약속에 따른 의무 또는 결과로서 거룩함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그들의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그들의 율법은 모두 ‘사랑’을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정이란 사랑이라는 율법과 거룩에 대한 명령을 교육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통로였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의 기독교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믿고 따르는 말씀들이 전도와 선교를 통해 수평적으로 각 나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본래 구약 시대에는 수평적 전파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대개 가정 안에서 자녀에 대한 교육의 형태로 자신들의 사상과 학문이 수직적으로 전해 내려졌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철저하게 유기적인 공동체로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이는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나왔다는 그들의 믿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둘이 아닌 한 몸에서 나온 것이기에 서로를 질투하지도, 미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아담의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란 하와에 대한 고백은 그야말로 한 몸인 배우자를 향한 최고의 사랑 고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정의 분열로 가족은 각각이 독립적 개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는 부부가 한 몸이 아닌 철저하게 다른 두 몸으로서 서로를 평가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결혼할 배우자를 고를 때도 자동차를 고르듯 스펙을 따진다. 처음에는 풀 옵션의 에쿠스 같은 스펙을 가진 배우자를 찾다가 자신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경차 정도의 스펙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불만족을 대리적으로 채워줄 자녀를 앞세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거룩함을 교육하기보다 오로지 경쟁과 전투를 가르치게 되고, 전쟁이 초래한 정서적 굶주림 속에서 정신적 혼란을 일으킨 자녀들은 존속살인, 혹은 가족해체라는 쓰디쓴 결과를 야기한 것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 우리 자녀에게 사랑과 거룩에 대한 순종을 훈육하지 않게 되었다. “쉐마(Shema)!” “들으라!” 우리가 우리네 자녀에게 들려주고 교육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거룩일까, 경제와 수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