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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에세이]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로스트로포비치…
두 사람은 첼로를 저음악기에서 화려한 독주 악기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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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24호 박현준⁄ 2011.05.30 11:50:4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러시아 출신인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와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첼리스트로 손꼽힌다. 그리고 현재 가장 유명한 첼리스트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인 러시아 출신의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이다. 특히 로스트로포비치는 스페인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와 더불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저음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첼로를 화려한 독주 악기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한 이들이기도 하다. 피아티고르스키는 1903년에 유태계의 우크라이나인으로 태어나 1976년에 미국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일곱 살 때부터 첼로를 공부했는데, 장학금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열세 살이던 해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극심한 혼란이 닥치자 그는 외국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소를 운반하는 화물차에 숨어 폴란드로 향했다. 그러다 경찰에게 발각되어 경찰이 쏘는 총에 첼로는 망가졌지만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열여덟이 된 그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 잠시 공부를 하였으며 카페에서 연주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때 카페를 찾은 베를린 필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베를린 필의 수석 첼리스트가 되었다. 1929년 그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유럽의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그는 호로비츠와 같이 카네기 홀에서 연주를 했다.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커티스 음악원의 수석 첼로 교수였으며 탱글우드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가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다. 아서 루빈스타인(피아노), 하이페츠(바이올린)와 실내악 연주를 하고 녹음도 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백만 달러 트리오’라고 불렀다. 그는 열정적이며 표현성이 강한 연주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러한 연주 방법은 20세기 초에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 샬리야핀(Chaliapin)으로부터 배웠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였으며 유명한 인권 운동가이자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최고의 음악가였다. 또한 세계 곳곳에 호화로운 주택을 가지고 값비싼 명화를 수집하는 재력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장 유명한 첼리스트의 한 사람인 마이스키 같은 저명한 제자도 길렀으며 대한민국의 자랑인 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마도 20세기 후반의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음악가는 바로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라얀은 많은 녹음으로 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로스트로포비치처럼 전 세계의 명예와 훈장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의 바쿠시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모두 음악가였다. 아버지는 폴란드의 귀족의 후손으로 종교는 러시아 정교였다. 네 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열 살 때는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웠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42년에 처음으로 첼로 콘서트를 열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43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1948년까지 첼로뿐만 아니라 지휘와 작곡도 함께 공부했다. 그 당시 그의 스승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였다. 1947~1950년에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등지에서 열리는 콩쿠르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스물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당시 러시아 최고 상인 스탈린상을 받았다.

1955년에는 볼쇼이 오페라 극장의 유명한 소프라노 비쉬네프스카야와 결혼을 하고 1956년에는 모교인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쳤다. 1963년에는 처음으로 서방 국가에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벤자민 브리튼 같은 작곡가들을 만나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브리튼은 자신의 ‘첼로 소나타’와 ‘첼로 심포니’를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했고 초연을 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볼쇼이 오페라에서 자신의 처가 타티아나로 나오는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였으며 1968년에는 런던의 프롬에 출연하여 극찬을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민주화 운동가로서도 유명하다. 1948년 소련당국이 쇼스타코비치를 형식주의자라 낙이하고 음악원에서 해고하자 당시 스물한 살이던 로스트로포비치는 항의의 표시로 퇴학을 택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이 반체제자로 낙인되어 집에서 쫓겨나오자 오이스트라흐 오갈 데 없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로스트로포비치가 감옥이나 강제노동을 면한 것은 오로지 그의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다. 일련의 사건 때문에 공산당의 미움을 받기 시작한 그와 그의 아내는 외국에서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러시아의 시골을 찾아다니며 연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직에서도 해임되고 다시는 그 심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미국은 이스라엘로 가기를 원하는 유태계 러시아인을 보내지 않으면 컴퓨터 같은 기술도 수출하지 않겠다고 압력을 가했고 러시아 정부는 이에 굴복해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이스키 같은 예술가들이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스트로포비치 가족은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시민권을 박탈하였으나 소련이 개방된 1990년에 다시 회복되어 러시아에 방문할 수 있었다. 1977년부터 1994년까지 그는 워싱턴의 국립 심포니를 지휘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헤리치, 히리터, 호로비츠 등과 연주를 하고 매년 영국의 알데부르크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가 무너진 장벽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전 세계로 방송됐는데 현재 DVD로 볼 수 있다. 1993년에는 옐친 대통령이 공산당의 쿠데타로 위기에 처하자 모스크바로 달려가 그를 도왔으며 워싱턴 국립 심포니를 데리고 가 모스크바에서 연주를 하면서 옐친과 러시아 국민을 고무시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전 세계에서 많은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7년에는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받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의 KBE’를 받았으며 네덜란드의 베아트리스 여왕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그에게 최고의 훈장을 수여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의 병석을 찾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 되어 끝까지 그를 돌보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페인의 소피아 여왕 등 세계적인 명사들과도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아내는 고향인 바쿠를 잊지 않고 찾아가 박물관을 짓고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그는 많은 작곡가들한테도 존경을 받았는데 그가 초연한 첼로 음악만도 117편이나 된다. 또한 그는 값비싼 명화를 많이 수집하기도 했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컬렉션이 크리스티에 경매로 나오자 러시아의 한 부호가 이것을 전부 구입해서 러시아로 보냈다. 그 판매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최저 가격인 2천만 파운드(한화 약 4백억 원)를 넘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조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역사상 가장 가혹한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러시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20세기 최고의 음악인이자 가장 존경받는 유명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 독제와 맞싸운 용감한 투사였으며 20세기의 최고의 인본주의자(Humanitarian)의 한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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