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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회 교수의 sexology]조선조 춘화(春畵)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진실

성교육·인구 증가 정책 등에 다양하게 사용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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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3-234호 박현준⁄ 2011.08.08 13:54:57

김원회 부산대 명예교수, 대한성학회 초대회장 춘화(春畵). 다른 말로 운우도, 춘투도, 일소도, 춘정화, 춘의화 등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남녀 간의 성애나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뜻하므로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누드화를 비롯한 숱한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20세기 초반 이전의 작품들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동양의 춘화들은 주로 일본 에도시대의 것들이거나 중국 명나라 때의 그림들인데 사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춘화를 그저 젊은이들의 눈요기 감이나 성적 욕구를 증진시키기 위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중에는 성교육용이었던 것도 있고, 성기능장애를 치료하거나 이성이 쉽게 끌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들고 다니던 일종의 주술적 목적의 것도 있었다. 춘화는 그 옛날 거의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집가던 일반 가정의 규수들의 첫날밤 두려움을 좀 덜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활량들이 기방 같은 곳에서 새로운 체위를 섭렵하기 위해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빨리 왕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어린 왕비나 세자빈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시각교재로 많이 사용됐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남기도 했다. 조선조의 춘화는 주로 영조-정조 연간에 많이 그려졌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고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여하튼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부유층 집안 같은데서 화가를 불러 며칠씩 유숙시키며 은밀히 그리게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선지 현재 발견된 것들 중에는 상당한 예술성을 지닌 작품들도 꽤 있다. 작가가 분명치 않은 민화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는 다른 화가의 작품의 모작도 있고 조잡한 것들도 있다. 현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정재 최우석 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한 두 권씩의 화첩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위 여부가 계속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들의 예술성으로 보아 위작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춘화는 단순한 눈요기감에 그치지 않아 왕 후계자 낳기 위해 왕비-세자빈에게 성교육용으로 사용되기도 유교사상-체면의식 때문에 춘화 몰래 즐기던 사람들 많아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조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일반에게 잘 공개가 되지 않았다. 다락방 깊은 곳 같은 데에 숨겨져 있다가 없어진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유교사상으로 생긴 성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이런 그림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체면의식 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몰래 보고 즐기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우리네 내숭문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동양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춘화의 기록은 은의 마지막 왕이기도 한 폭군 주왕이 달기와 잠자리에서 같이 본 병풍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가 3000년 전이니 그 역사가 자못 길다고 하겠다. 중국의 춘화에는 궁중이나 상류사회 계층의 인물들이 주로 등장하며, 체위에 치중하는 교육적 목적의 그림이 많은 편이다. 그 외 수간, 동성애 등 비 정형적 성을 다루기도 하며, 특히 왕의 정사 장면이 적지 않고, 아기를 데리고 관계하는 장면이 가끔 등장하는 것도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또한 사무라이 계급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특히 성기, 그 중에서도 남성의 성기를 크게 확대시키는 것과 여성의 음모를 하나하나 일일이 그리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춘화를 그리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 털 그리는데 소비했다고 한다. 이들에 비하면 한국의 춘화는 너무 다르다. 조선조의 춘화들이 19세기 중엽까지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고 그 후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충 봐도 이들 두 나라의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네 춘화는 한 마디로 사실화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때의 생활양식 그대로와 순박한 서민들의 성을 있는 그대로 담은 듯 강한 친밀감을 준다. 조선조 당시의 가옥이며 의복, 가구 등을 그대로 볼 수 있어 또 다른 볼거리가 됨은 물론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기도 한다. 거기엔 화려한 의상도, 과장된 성기도 그리고 비현실적인 성행동을 보여주는 장면도 찾아 볼 수 없다. 중국-일본 춘화는 직접적이고 화려한 요소 많은 반면 한국 춘화에는 해학적-은유적 요소 많아 과장되게 드러내기보다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은밀히 남녀성기 표현해 유명 화가들의 것도 그렇지만 민화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약간씩 해학적인 부분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고, 은유적인 장면도 많이 보인다. 자연을 많이 곁들여 우리네 성이 도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어떤 것은 그저 풍경화 같기만 한데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남녀의 성기 모양을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넣어 놓은 것들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 계층을 다 망라하고 있으나 주로 서민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혜원 신윤복의 유명한 ‘월하정인’ 제하의 그림에 그려진 달의 모양을 보고 당시의 날짜와 시간까지 유추한 흥미로운 글을 봤다. 모델을 세워 놓고 그린 그림이 아닐 터이니 가능성이 희박하고,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이런 관찰력은 참신한 아이디어라 아니할 수 없다. 단원과 혜원의 춘화첩에는 승려와 젊은 여인 사이의 그림이 각각 한편씩 있는데 모든 해설들이 아이를 못 낳은 여인네가 백일기도를 갔다가 또는 탑돌이를 하다가 승려와 눈이 맞아 일어나는 정사로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인들은 둘 다 머리를 길게 땋고 있다. 즉 미혼이란 얘기다. 따라서 굳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불임 여인을 따라 온 몸종일 가능성이 많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 때 혜원 신윤복이 여자라는 내용의 픽션도 있었지만 그의 춘화들을 보면 있을 수 없는 얘기가 된다. 우선 그림 속의 저고리 길이가 19세기 초의 것으로 그가 50이 넘어서 그린 것들이 틀림없는데 순종조의 엄격했던 사회 분위기로 보아 그가 그 나이 되도록 성별을 속이고 살았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17세기 초부터 많은 춘화들이 주로 목판화로 제작돼 대량 보급됨으로써 지금 세계 어느 성 박물관을 가도 그들의 춘화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목판화로 제작돼 보급된 흔적이 전혀 없다. 역사에서 보면 어느 나라고 인구가 줄게 되면 그 사회의 지도층이 제일 먼저 예민하게 반응해 성을 개방 보급하는 정책을 썼고 춘화는 그 중요한 도구가 되곤 했다. 그래선지 남자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던 에도, 즉 사무라이 시대의 일본의 풍속화라고 할 수 있는 ‘우키요에’는 춘화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뤘다. 신유한이란 문인이 1719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으로 갔다가 1년여에 걸친 여행을 마치고 쓴 해유록에 ‘그들은 금수와 같을 정도로 남녀 간의 풍기가 문란하고, 사람마다 춘화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조선조 성종이전까지는 대체로 프리섹스 사회였다. 신라의 토우, 신라와 고려의 가사들, 고려 거울 뒷면의 조각 같은 것들이 이를 뒷받침 해주는 좋은 예들일 것이다. 1123년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 ‘고려인들은 남녀가 경솔하게 만나 혼인하고 쉽게 갈라선다’ ‘여름이면 시냇물에 들어가서 남녀들이 구별 없이 벌거벗고 목욕을 한다’라고 썼던 걸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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