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TV는 온통 오디션 열풍이다. 별의별 순위 정하기 프로그램이 낮밤 없이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런데 이 프로들을 잘 보면 가장 재밌는 부분은 뒤쪽, 즉 탈락시킬 때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탈락자가 정해져 누구는 펄쩍펄쩍 뛰고 누구는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에선 눈을 떼기 힘들다. ‘안전망 없는 탈락의 공포’에 가위눌리며 사는 한국인들에게, 남의 탈락을 구경하는 재미는 각별하다. 그런데 이 재미있는 ‘탈락 쑈’에서 최근 이상한 장면이 나왔다. SBS ‘기적의 오디션’에서 도전자 중 일부를 탈락시켜야 하는 배우 이미숙과 김갑수가 눈물을 쏟은 것이었다. 이들은 “누구를 잘라야 할지 너무 힘들다” 또는 “이렇게 탈락시키고 탈락당하는 우리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가차 없이 자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프로그램에서 심판관들이 물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까? 이 프로그램은 이후 시청률 하락으로 고전 중이라는 뉴스도 뒤따랐다. 일정한 시간을 함께 보내 개인 정이 든 상태에서 특정인을 자르기란 이렇게 쉽지 않다. 문제는, 개인 정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을 자를 때 벌어진다. 한국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학입시 또는 취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객관적인 성적은 더 좋은데도 외국어고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상한 비밀공식’을 들이대며 불합격자를 양산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스카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력 측정도 않고 서류심사에서 탈락시키는 기업, 또는 평생 영어 한 마디 쓸 일이 없는 직원을 구하면서 토익 성적으로 당락을 결정짓는 이상한 습관들이다. ‘지푸라기 하나 더 얹었더니 그 무게로 당나귀 허리가 휘어졌다’든지 ‘등산이 힘들 때 눈썹 하나를 뽑아내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미세한 양적 차이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시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외국어고-스카이대학-영어성적이 과연 인생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출신 대학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한국인들이 재미있어 할 이야기가 있다. 미국 동부의 명문 예일대학 졸업생이 있고, 텍사스주립대학의 졸업생이 있다. 누가 더 우수할까. 예일대를 서울대 정도로, 주립대라면 국립 지방대 정도로 아는 한국인에게는 답은 자명하다. 예일대 졸업생이 백배, 천배 더 우수할 것 같다. 그런데, 이 학생의 경우 대학-대학원 모두 텍사스주립대에 먼저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뒤에 ‘할 수 없이’ 예일대를 갔다면? 바로 미국의 직전 대통령 부시의 스토리다. ‘거부의 아들이자 장차 대통령 될 귀족 자제’의 입학 시도를 텍사스주립대는 두 번이나 거절했고, 동부의 부자 사립대학 예일은 두 번이나 받아들였다. 두 대학에 모두 독자적인 입학 또는 탈락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탈락시키기가 일상이 된 한국에서, 이제 우리에게도 탈락의 철학이 필요할 것 같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은 “나보다 성적이 더 나쁜 학생을 합격시킨 건 부당하다”는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하버드는 “당신의 성적이 더 좋다고 반드시 뽑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고 입장을 밝혔고, 여론은 물론 법정도 하버드의 손을 들어줬다. 성적만을 기준으로(요즘 일부 대학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탈락 여부를 결정짓는 한국에선 학생들이 미친 듯이 외우기 공부에 열중하지만, 미국에선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공부도 공부지만 예능-봉사 활동도 중요하다. “공부만 한 이기주의자는 필요없다”는 것이 많은 미국 명문대학들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탈락의 철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