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선 (한나라당 국회의원) 2008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당대회에 2주간 참관한 적이 있다. 덴버(민주당)와 세인트 폴(공화당)은 도시 전체가 전국에서 모여든 정치인, 대의원, 기업인, 언론인과 지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일주일 내내 도시 전체에서는 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행사들이 열렸다. 토론회, 모금 파티, 문화 행사, 타운홀 미팅, 지지 연설 등으로 전당대회 기간 동안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행사를 안내하는 시간표가 마치 TV프로그램 편성표처럼 배포되곤 했다. 편성표에 들어 있는 행사는 공식적인 행사여서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전체 행사의 양으로 치면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오후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경 마치는 전당 대회장의 지지연설은 그야말로 라이브 정치 쇼였다. 각종 연주, 영상, 지지연설 자체가 노련한 프로듀서의 손에서 빚어지는 작품이었다. 지지연설 하나하나의 내용뿐만 아니라, 전체 진행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귀가 즐거웠다. 그런데 전당대회장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무대 뒤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성조기였다. 큰 실내 경기장 중앙에 설치된 대형 무대의 뒷면을 모두 가릴 만한 대형 스크린이니 크기도 엄청 컸다. 그런데 그 큰 스크린에 내내 바람에 펄럭이는 성조기가 비쳤다. 스크린을 꽉 채워 커다란 성조기가 센 바람에 천천히 펄럭 펄럭 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박자에 맞춰 미국사람도 아닌 나까지도 가슴이 울렁울렁 했다. ‘영상이 이렇게 감정을 고양시킬 수 있구나’ 싶었다. 그것도 ‘사람’에 대한 게 아닌 ‘나라’에 대한 감정까지도…. 내 기억에 남는 국기는 40년 전 마감 방송에서 보았던 애국가와 함께 흐르던 태극기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나는 더 놀고 싶어 일찍 잠들기 싫을 땐 종종 외할머니께 “할머니, 우리 오늘 애국가 나올 때 까지 놀자”라는 말로 졸랐다. 그땐 TV방송이 자정이면 마치던 시절이었다. 스크린 속의 성조기를 보고나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이후론 월드컵 때 관중석을 따라 흐르던 태극기 말고는 마음을 울렸던 태극기는 없었던 것 같다. 4월 국사편찬위원회 대강당에서 한국사 교육을 필수화 하자는 취지로 토론회가 열렸다. 어릴 적 마감방송에 나오던 태극기, 월드컵 때 펄럭이던 태극기에 이어 강당 무대 뒷벽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 태극기는 대강 눈짐작으로도 가로가 1m는 훨씬 넘었을 것 같았다. 고가의 고서화 작품이나 넣을 듯한 고풍스러운 나무 액자에 태극기가 들어 있었다. 잘 생긴 액자에 들어있는 커다란 태극기는 상해 임시정부에 걸렸던 것이라는 역사적인 꼬리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와 품위만으로도 감동을 자아냈다. 그 태극기는 그 자체로서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축사에서 나는 역시 국사편찬위원회의 강당에 걸맞는 태극기를 보아 모처럼 감동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각종 국가 기관에 걸려있는 태극기, 해외 출장 중에 공관이나 대사관저에서 보이는 태극기, 여러 행사장에서 조우하는 태극기가 왜소하고 조악해 감동은커녕 상실감마저 들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형식만 갖춰서는 안 된다. 감동을 주는 모습을 갖춰야만 한다. 액자에 거는 태극기, 깃대에 게양하는 태극기, LCD화면으로 비추는 태극기 등 어떤 모습의 태극기가 가장 감동을 자아내는지, 대회라도 열면 어떨까? 태극기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빛의 속도로 ‘내 나라’의 존재감을 가슴에 심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