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6월 1일 정치개혁의 기대 속에 출범했던 18대 국회가 2월 28일 본회의를 끝으로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만을 남긴 채 사실상 활동을 마감했다. 18대 국회는 여야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여파로 정치공방만 주고받다가 개원 42일이 지난 2008년 7월 10일이 돼서야 가까스로 첫 번째 본회의를 여는 등 시작부터 험난했다. 특히 새해 예산안이 4년 내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의해 단독처리 된 것을 비롯해 갖가지 진기록을 양산했다. 2008∼2010년 해마다 4대강 사업 예산에 발목이 잡혀 ‘4대강 예산 여야 대치 → 예산안 부실심사 → 여당 강행 처리 및 야당 점거농성’이라는 수순을 반복했다. 2011년에는 18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합의처리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으나, 론스타 국정조사 도입에 합의해주지 않은 한나라당에 반발해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전원 표결에 불참하는 과정에서 격한 몸싸움이 일어나는 등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번번이 난장판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2008년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통과할 때는 전기톱과 해머, 소화기가 등장해 ‘막장 드라마’의 전형을 보였고, 2009년 7월에는 미디어법 처리를 놓고 여야가 동시에 본회의장을 점거해 주먹질을 주고받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18대 국회 후반기에 들어와 여야 원내 지도부가 대화의 정치를 강조하면서 정치 복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핵심 쟁점을 놓고는 어김없이 격한 대립으로 일관해 국회 폭력과 파행이 공식화되는 등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2011년 11월 한미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는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해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국회의장석 앞 단상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등 여야가 보여준 행태는 ‘막가파식 국회’의 절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로부터 입법로비 대가로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국회의원을 구제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공직선거법을 처리하려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개정을 포기한 일도 있었다. 이어 2011년 8월에는 여대생 성희롱 발언 파문을 일으킨 무소속 강용석 의원 제명안을 무기명 표결에 부쳐 부결시키는 등 여야는 ‘기득권 지키기’에는 예외 없이 한마음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여야는 대표적인 총선용 ‘포퓰리즘 입법’으로 불리는 ‘저축은행 피해구제 특별법’ 처리도 시도해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5천만 원을 초과한 저축은행 피해자의 예금을 국민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이 법을 2월 27일 법사위에 전격 상정했으나 여론 악화 등 후폭풍을 우려해 표결에 부치지 않고 계류시켰다. 하지만 중소 신용카드 가맹점에 대한 우대 수수료율을 금융위원회가 정하도록 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은 정부와 카드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시장경제의 근간인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도록 한 위헌적 발상이란 비판이 제기된 법이다. 이런 법안이 선례로 남으면 시장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여야 모두 끝내 무책임한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법안을 통과시킨 만큼 대통령이 단호하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4ㆍ11 총선 국회의원 의석수를 299석에서 300석으로 늘리는 선거구 획정안을 의결, 정치개혁과 민생국회를 바라는 국민의 목소리에 철저하게 귀를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입법부 수장인 박희태 국회의장이 부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임기를 3개월여 앞두고 불명예 퇴진한 것은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민의 실생활과 직결된 민생 법안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밥그릇 챙기기에만 막판까지 혈안인 모습에서 ‘국회의원들이란 참으로 염치도 모르는 뻔뻔한 사람들’이라는 국민의 지적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심원섭 정치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