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300명이나 되는 고액 연봉자를 뽑고 나서도 여전이 대한민국은 정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연말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 때문일 터이다. 이렇게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그간 얼굴조차 뵙기 어려웠던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한 표를 구걸하며(?) 측은하기 까지 할 정도의 저자세로 납작 엎드려 손을 내민다. 힘없고 ‘빽’없는 백성들은 요즘 ‘역시 민주주의야’하며 순간을 즐기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몇 십 배 백성을 괴롭힐 것을 잠시 잊는 걸 보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은 역시 소시민, 소인배임에 틀림없다. 선거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국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정치인들은 또 국민의 여망, 요구, 명령을 들먹이며 전국을 내돌며 자신을 홍보하고, 국민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한다. SNS와 트위터는 물론 가상현실인 인터넷 세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온갖 궤변과 사변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런 첨단 도구와는 별도로 가장 강력하고 전통적 정치인들의 무기가 있으니 바로 색이다. 한국 정치판의 모든 선거에서 색깔론이 빠진 적 없다. 모든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후보자는 자신의 색을 분명하게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색을 감추는 전략을 택할 때 색깔론은 더욱 극성을 이룬다. 이때 색깔은 소위 이념과 관련된 것이다. 색깔론은 조금 철이 든 뒤 6.25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자라 보고 놀란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솥뚜껑을 보고도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은 자신의 색깔을 모호하게 유지하며 좌우 중도를 아울러 표 또는 여론을 모은 후 스리슬쩍 지도부를 차지하고 난 뒤에야 본색을 드러낸다. 이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전술-전략으로만 이해하는 정치인들은 색을 감추려 하고 국민은 꼭 색을 확인하려 든다. 이념의 색은 감추면서 자신들의 색을 드러내는 데는 열심이다. 사실 색은 감성을 자극하는 매우 효율적인 마케팅 도구다. 인간은 색채에 대해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는 곧 구매충동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득표율 0.01%에도 울고 웃는 금배지 지망생들은 확실하게 그 성과를 측정할 수 없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색을 중시하며 사용한다. 사람들을 색으로 유인하는 컬러 마케팅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색깔론은 개념론에 밀려 그리 큰 이슈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컬러 마케팅이 대세를 좌우했다. 선거에서 예상 이상의 성적을 올린 새누리당은 컬러 마케팅에서도 다른 당을 압도했다. 우선 새누리당은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당명과 로고 그리고 심벌을 모두 새롭게 만들었다. 색깔론 탓에 터부시되는 ‘빨간 색’이 아닌 ‘붉은 색’을 사용함으로서 선거에서 이념의 틀을 깨버렸다. 붉은 색은 60대 이상에게는 공산당, 인공기를, 50대 이후에게는 붉은 악마나 국가대표 축구팀을 연상시킨다. 시대가 변하면서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뀐 것이다. 게다가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영국, 호주 등 선진국을 떠올리게 돼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마저 준다. 이에 비해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은 색에 있어서 정체성이 흔들린 측면이 있다. 노란색은 1987년 평민당 후보였던 전 김대중 대통령과 2002년 대통령을 만들었던 노사모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란색은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봄이라는 선거철과 맞아떨어지는 선택이다. 그러나 통합과 호남 이미지를 위해 노란색과 함께 그 동안 민주당을 상징해온 녹색을 조합한 전략은 자신을 어필할 색이 둘로 나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이미 노란색에서 DJ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의 실정과 독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측면도 있어서 역으로 새 누리당의 ‘전 정권 심판론’이 유권자들에게 먹히는 빌미를 주었다. 물론 유세장에서는 주로 노란 점퍼를 입어 통일을 기하려 했지만 진보당(선거 당시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이루면서 다시 노란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유권자들에게 선명한 시각적 기억을 주입시키는 데 실패한 측면이 있다. 진보당의 보라색은 권력과 부귀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아웃사이더의 색이기도 하다. 속성상 화합을, 정치사상적으로는 페미니즘을, 소외계층을 배려하는 자비를 상징하는 색이 보라색이다. 빨강과 파랑을 섞어 얻어진다는 점에서 통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당의 컬러 마케팅은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물론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 인권, 삼대 세습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에 대해서는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진보당의 컬러 마케팅은 색깔을 흐리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상외로 진보당의 보라색은 4.11 총선을 주도했다. 왜냐면 선거를 관리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주조색이 진보당의 보라색과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관위가 내건 선거캠페인과 공명선거 등등에 사용한 현수막과 홍보물의 색깔은 진보당의 그것들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투표함에 들어가는 선거용지조차 보라색으로 되어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진보당에 투표하라는 느낌까지 줄 정도였다. 새누리는 50대 이하에게는 거부감 덜한 붉은색을 잘 사용했고, 진보당의 보라색은 선관위의 ‘의도 안된 지원’ 받아. 민주당은 노랑-녹색 뒤섞이고 보라까지 가담해 통일성 못 줘 중앙선관위가 부분적으로나마 보라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2010년경부터다. 그런 점에서 2011년 말 창당한 진보당의 보라색은 ‘뻐꾸기의 탁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선거 때면 태극을 기조로 한 심벌 외에 보라색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법통(?)을 이어받은 진보당의 보라색은 정당성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색채를 선거관리에 활용하겠다는 의도는 선진적이며 시의적절한 선택이었지만, 색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잘못은 색채 전문가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사결정권을 지닌 담당 공무원들의 아마추어리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건 마케팅이건 색은 표시인 동시에 의미이며, 색채 연상을 통해 충성스런 고객을 끌어들이는 도구이자 수단이 된다. 구성원들의 일체감, 연대감을 이끌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색은 중요하다. 색을 알고 색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색의 이면에 자리한 내용이다. 색으로 아무리 눈길을 끌어도, 겉과 속이 다르다면 없었던 환멸감까지 안겨주며 발길을 돌리게 만들 뿐이다. - 정준모 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