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다마라 했던가. 정주영도 1960년 4.19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건설업체들 중 국고환원 통보를 받은 업체는 대동공업, 중앙산업, 삼부토건, 극동건설, 흥화공작소, 대림산업, 현대건설 등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삼부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과 현대건설 등은 부정축재자 처벌이란 예봉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더욱 발전한다. 반면에 ‘건설 5인조’ 그룹의 선두를 달리던 대동공업과 중앙산업은 사정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점차 퇴조했다. 베트남전쟁 계기로 해외사업 적극 확대 이후 현대는 다각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첫 시도는 1962년 9월 현대양행의 설립이었다. 건설 부문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보다 수준 높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대양행(두산중공업의 전신)을 설립했던 것이다. 1963년 6월에는 내자 5억 원과 AID차관자금 등 외자 425만 달러를 동원해서 충북 단양에 대규모 시멘트공장(연산 20만 톤)을 건설했다. 1959년 당시 문경시멘트와 동양시멘트가 연 41만 톤을 생산했으나 수요는 45만 톤으로 수요 초과 상태였다. 정주영은 1958년에 충북 단양군 매포면에 있는 석회광 5개 광구를 1억 3000여만 환에 매입하고 건설공사에 착수, 1964년 7월에 완공했다. 1968년에는 연산 40만 톤으로 확대(내자 3억 5000만 원, 외자 310만 달러)하고 1970년 1월에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를 독립시켜 현대시멘트(주)로 발족하였다. 이후 현대시멘트는 종래 현대건설의 자체 조달체제에서 벗어나 일반 시판 위주로 전환하였는데, 1973년 5월에는 미국 수출입은행 등으로부터 1065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해 연산 120만 톤의 대형 시멘트제조업체로 성장했다. 한편 현대는 설립 이래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도했는데 계기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베트남전쟁이 장기화하면서 1965년 2월 2000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처음에는 육군 공병부대 위주였으나 이후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대 등 전투병 위주로 증원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 대가로 한국 기업들에게 베트남 진출기회를 제공했는데 이를 계기로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했다. 그 와중에서 현대건설은 국내 최초로 1965년 9월 태국의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큰 손해를 봤으나 국내 건설업체들의 해외진출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1966년 1월에는 베트남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 돌관경영으로 공사를 완공했다. ‘불가능은 없다’와 ‘빨리빨리’, ‘대충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적 경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캄란에서 15km 떨어진 방오이의 주택건설공사도 수주했으며 주월미군 대상의 세탁사업도 병행하였다. 자동세탁기 16대와 디젤발전기 6대, 스팀보일러 2대 등을 구입하여 나트랑, 퀴논, 캄란 등에 7개의 세탁공장을 설치해 1966년 한 해 동안 건설 및 세탁사업 등으로 총 100만여 달러를 벌어들였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참여, 국내 최대 건설업체로 부상 현대건설은 1968년 2월에 착공된 서울-부산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고속도로 건설경험이 전무했던 정부는 계획 초기부터 현대건설을 참여시켰는데,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공사 경험을 높이 산 탓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에는 육군을 비롯하여 현대, 대림, 동아, 삼부, 극동 등 국내 굴지의 16개 건설업체가 참여하였는데 최대 구간을 시공한 업체는 현대건설이었다. 서울-수원 공구를 비롯, 전장(全長) 4차선 428km중 40%를 현대건설이 담당한 것이다.
착공 2년5개월만인 1970년 7월에 완공되었는데 총 공사비는 429억 원이 소요되었고, 현대건설이 수주한 금액만 전체 공사금액의 20.51%인 87억 9600만 원이었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통해 얻은 이익은 3억3000만 원에 불과했으나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은 국내 최대의 건설업체로 부상하게 되었다. 1968년 2월 27일에는 자본금 1000만 원의 경일운수를 설립했다. 당시 현대건설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자재를 수송할 화물트럭의 임대를 위해서였다. 1970년 8월에는 충북 옥천의 금강유원지를 개발해서 상호도 금강개발로 변경하고 강릉비치호텔(동해관광호텔)을 인수했다. 1973년부터 울산조선소 내의 식당위탁관리와 울산쇼핑센터를 운영하는 등 현대그룹의 관광, 서비스업 부문 다각화의 중심축으로 역할을 하였다. 현대엔지니어링은 1973년 5월 현대건설 기술사업부를 모체로 하여 출발하였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보다 고차원의 종합기술지원과 해외건설사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용역전문업체로 독립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1974년 2월 11일에 현대건설 기술사업부를 분리하여 자본금 1000만 원의 현대종합기술개발로 발족했다가 1980년 11월 중화학투자조정정책의 일환으로 한라엔지니어링을 합병하여 1982년 3월 20일에 현대엔지니어링으로 변경되었다. 동서산업은 1969년 4월 11일에 설립한 현대콘크리트로부터 비롯되었다. 현대건설에 각종 콘크리트관, 블록, 벽돌 등을 공급하는 소규모 회사였던 현대콘크리트는 1971년 12월말에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현대건설에 흡수되어 콘크리트 제조공장으로 유지되었다. 1975년 9월 1일부로 자본금 2500원의 벽제콘크리트로 재분리되어 운영되다가 1976년 4월 9일에 동서산업으로 변경되었다. 주택건설경기 조성에 힘입어 아파트문화 주도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건설의 주택사업을 분리하여 설립되었다. 현대건설은 1973년 초부터 주택건설작업을 본격화하여 서빙고 현대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을 건설하면서 국내 아파트문화를 주도하였다. 이후 주택건설경기가 조성되면서 현대건설은 주택사업에 주력하기 위하여 현대건설 주택사업부를 모체로 하여 1976년 3월 25일에 자본금 2000만 원의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토목건축업과 부동산 매매, 임대를 목적으로 출범하였는데 1976년 6월에는 남지산업을 흡수해서 자본금을 2억1700만 원으로 확대하고 주택건설 전문업체로 거듭났다. 한국포장건설은 1976년 3월, 골재와 아스콘을 생산하던 현대건설 관악중기공장 소속의 관악석산을 분리하여 설립한 도로포장 전문업체이다. 자본금 1000만 원에 크러셔 1대와 100톤 아스팔트플랜트 1대의 시설을 갖추고 출발한 한국포장건설은 골재와 아스콘을 생산하여 주로 현대그룹 각 계열사에 납품하면서 성장하였다. 같은 해 7월에 한국정수공업으로부터 토건업면허를 인수하고 1977년 12월에는 포장공사업 면허를 취득하여 건설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해 3월에는 토건 및 도로포장 건설을 주력업종으로 하는 고려산업개발을. 1975년 12월에는 알루미늄 창호자재의 생산을 목적으로 현대알미늄을 각각 설립하였다. 한라건설과 현대산업개발도 설립했다. 한라건설은 1977년 10월 14일에 현대양행이 해외건설사업을 목적으로 자회사(자본금 15억 원) 형태로 설립한 회사였다. 1978년 3월 29일에 한라개발을 흡수하여 군납업, 해외 전기공사업, 중기 대여업, 항만준설 공사업, 포장공사업 등을 수행하는 종합건설업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현대양행이 정부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한라건설은 현대양행으로부터 분리, 현대그룹의 계열사로 존속되었다. 1977년 10월에는 토목건축 및 아파트 분양을 목적으로 현대산업개발을 설립했다.
현대의 위성그룹 ② - 성우·KCC·현대산업개발 현대그룹의 도움으로 재벌 도약 성우그룹 -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鄭順永) 또한 정인영과 마찬가지로 학업을 마친 후 현대그룹의 경영에 참여했는데 그는 1980년에 현대시멘트를 분리하여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정순영은 독자적으로 현대종합금속을 경영하고 있었다. 1975년 9월에 설립된 현대종합금속은 용접봉, 카바이트, 자동차부품 등을 생산하는 업체였다. 정순영은 현대시멘트를 모기업으로 해서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85년 5월 화물운송업체인 현대종합상운을 설립하였고, 1987년 5월에는 DRUM, DISK, HUB 등의 자동차 부품용 주물을 생산하는 서한정기를, 1989년 2월에는 미국 벤딕스 사와 합작해서 시트벨트, 에어백 등을 생산하는 서한벤딕스를 각각 설립했다. 현대종합상운은 현대그룹의 물류를 담당했으며 서한정기 및 서한벤딕스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부품납품을 통해 대규모 레저타운을 건설하고 이를 경영하기 위해 성우종합레저를 설립함으로써 관광업에도 진출하였다. 성우그룹은 1990년 현재 매출액 2038억 원의 중견 재벌로 부상했다. 정순영은 현대그룹으로부터 분가한 후 10년 만에 별도의 기업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성우그룹 또한 한라그룹처럼 모체인 현대그룹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재벌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KCC그룹 - 정주영의 막내 동생 정상영은 24세 때인 1959년에 금강스레트 대표이사로 현대그룹에 합류했다.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에서 경영수업을 쌓은 다음 1970년대에 현대그룹으로부터 (주)금강을 분리해서 독립했다. (주)금강은 1958년 8월에 현대건설 제1호 자회사인 금강스레트공업으로 설립되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근대적인 슬레이트공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설립초기에는 연평균 80%씩 급신장하여 1967년에는 국내 지붕재시장의 30%를 점유하는 과점업체로 성장하였다. 1969년에는 새로운 상품 개발과 사세확장에 힘입어 공장을 수원으로 옮기고 밤라이트와 나무라이트 등 불연성 건축재와 단열재를 생산하는 종합건자재 생산업체로 성장하였다. 이후 암면, 석고보드, 판유리 등 제품다변화를 추구하였다. 정상영은 (주)금강을 착실히 키워 1974년 7월에는 도료,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고려화학을 설립하였고 1989년 1월에는 (주)금강의 건설부분을 분리하여 금강종합건설을 설립, 금강그룹을 형성하였다. 현대산업개발그룹 - 한편 정주영의 셋째 동생 세영은 마지막까지 현대그룹에 남아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했다. 1953년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에 현대건설 상무로 입사한 이래 1967년에는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에 취임, 1974년에는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포니' 수출을 시작하면서 전세계에 한국 자동차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포니 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세영은 1999년에 현대산업개발을 분리해서 별도의 현대산업개발그룹을 형성했는데 동사는 1977년 10월 한라건설(주)로 설립되었다. 이후 한라개발(주)과 한라건축(주)을 흡수합병하면서 성장했다. 1986년 11월에 현대산업개발로 상호를 변경하고 같은 해에 한국도시개발(주)을 합병, 2000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산업개발 대규모집단으로 지정되었다. 이상의 위성그룹들은 철저하게 현대그룹과의 일정한 협력관계를 통해 재벌로 도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종합금속이 생산하는 용접봉의 주된 수요처가 현대중공업이고 서한정기의 브레이크와 서한벤딕스의 안전벨트는 현대자동차에 거의 전량 납품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국 벤딕스와 합작으로 설립한 서한벤딕스는 자동차 좌석벨트를 생산, 현대의 수출용 자동차에 장착하고 있다”(매일경제 1990년 12월 11일자)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