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현대그룹의 다각화작업은 다소 둔화된다. 그 와중에서 현대는 다른 재벌들처럼 관광, 유통, 금융 등 서비스업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다각화했다. 그리고 해외 현지법인의 설립 등 국제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번 회에는 1980년대 현대의 다각화 특징을 살펴본다. 첫째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에의 진출이다. LG, 삼성, 대우 등 경쟁관계에 있는 재벌들에 비해 늦게 전자사업에 진출한 현대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현대전자는 1949년에 설립된 업체로써 1983년 2월 현대그룹에 인수되었다. 그해 11월부터 PC 등 컴퓨터를 생산하는 한편 반도체 등의 생산을 위해 경기도 이천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198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이후 각종 가전제품을 비롯한 반도체, 컴퓨터 생산에 매진하여 단기간 내에 선발주자들인 삼성, LG, 대우 등과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6년 1월에는 현대마그네틱을 설립하고 1988년 2월에는 현대미디어시스템을 설립하여 당시 확장일로에 있던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산업에 참여했다. 1989년 5월에는 생산설비 제어장비와 공정제어장치, 데이터통신 등을 목적으로 한 현대정보통신을 설립하였다. 주력사업의 첨단화, 고부가가치화 착수 둘째 중공업의 첨단화, 고부가화 사업에 착수하였다. 1987년 9월에 전자제어장치 및 연료분사장치를 생산하는 현대케피코를 설립하였다. 현대중전기는 1983년 2월에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 사와 합작으로 한국산업서비스를, 1984년 3월에는 현대엘리베이터를 각각 설립하였다. 1984년 11월에는 사우디 알자밀 사와 합작으로 산업전자공장을 건설하고 1986년 6월에 미국 GE 사와 합작으로 한국전기동산을 설립하였다.
또한 1988년 7월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설립하여 공장자동화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84년 10월 현대중공업 내에 로봇절단팀을 조직, 1985년 5월에 일본의 (주)나찌와 기술도입계약 체결하고 1986년 2월에 스포트로봇(8810AK) 1대를 생산하여 최초로 현대자동차에 판매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88년 7월에 현대로보트산업을 설립하였다. 1988년 8월에는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하였다. 1973년 5월에 현대건설 소속 철탑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국내에 설치된 송전철탑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특히 초고압의 34만 5000 볼트용 철탑은 국내 제작이 불가능하여 전부 외국에서 수입하였던 것이다. 현대건설은 초고압용 송전철탑의 국산화개발에 착수, 1973년 6월에 34만5000 볼트용 송전철탑을 국내 최초로 제작하여 한국전력에 납품하였다. 1977년 7월에는 사우디에 송전철탑 3641톤을 수출하는 등 사업전망이 밝아지면서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1986년 9월에는 중장비 대여, 정비 및 기술용역 제공을 목적으로 현대중장비산업을 설립하였다. 현대중공업 중기사업부는 1985년 10월 일본 닛산 사에 5년간 소형 굴삭기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1986년 2월에는 미국 굴지의 중장비 제조회사인 드레슬러(Dresser) 사와 소형 크룰러 도저/로더를 10년간 OEM 방식으로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87년 1월에 4300평의 공장을 준공하고 이 부문을 분리, 독립법인화했던 것이다. 석유화학, 금융으로 영역 확장 및 국제화 추진 셋째 석유화학 산업에의 진출이다. 현대그룹은 1988년 9월에 충청남도 서산에 117만5000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조200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산 35만 톤의 프로필렌, 부타디엔, 스티렌모노머, 에틸렌 글리콜 등을 생산하는 계열 석유화학공장 등을 갖추고 현대석유화학을 설립하였다. 다른 재벌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이 부문에 진출한 현대그룹은 처음부터 국제 규모의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하여 경쟁력을 확보, 명실상부한 중화학공업 전문 기업집단으로 도약했다.
넷째, 국제화의 추진이었다. 현대그룹의 국제화 추진은 1981년 1월 한국알라스카자원개발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1970년대에 석유파동을 경험하면서 자원의 안정적 확보차원에서 서두른 조치였다. 또한 현대종합목재를 중심으로 해외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국제화는 가속화하였다. 현대종합목재는 가구 등을 미국에 대량으로 수출하였으나 가구는 부피가 큰 탓에 포장비, 운송료 등 물류비용이 큰 제품이었다. 더구나 이 무렵부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국내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두드러지면서 수출에도 차질을 빗기 시작했다. 차제에 현대종합목재는 미주지역에 대한 수출물량을 확대하기 위해 1982년 1월에 미국에 현지법인 HFI(Hyundai Furniture Industries)를 설립하였다. HFI는 1983년 1월과 1987년 8월에 미국 달라스와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가구조립공장을 건설하고 1983년 1월에는 솔로몬 원목개발 현지법인(HTC: Hyundai Timber Company)을, 1985년 8월에는 말레이시아 현지법인(SHWI: Sime Hyundai Wood Industries)을. 1987년 7월에는 미국 하이포인트에 현지법인(HFI)을 각각 설립하였다. 국내적인 물류비 및 인건비 점증에 따른 채산성 악화에다 선진국들의 수입규제에 대응,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섯째 백화점, 광고회사, 투자자문회사 등 서비스산업에의 진출을 확대하였다. 현대그룹 또한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그룹차원의 광고를 전담시키기 위해 1983년 11월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을 설립하고 1986년 10월에는 연구용역 및 증권투자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현대사회경제연구원을 설립하였다. 1987년 3월에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한무쇼핑을 설립하고 5월에는 설계용역전담사인 현대브라운엔지니어링을 설립하였다. 1987년 3월에는 현대투자자문을 설립하여 현대증권,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 등과 함께 금융소그룹을 형성했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보통신 등 사업다각화로 국내 최대 재벌 위상 세워 1982년 2월에는 금전등록기, 계량기, 사무기기의 제조를 목적으로 현대테크시스템을, 1987년 6월에는 해운대리점인 현대물류를 각각 설립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은 1980년대에는 삼성그룹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삼성그룹보다 10여년 뒤늦게 출범한 현대그룹이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경영환경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로서 도로, 항만, 철도 등 인프라확충과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주택수요 격증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현대그룹의 중심축이 토건, 자동차, 조선 등 전후방 효과가 매우 큰 중후장대형의 비용체감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그룹이 이 부문에 진출할 무렵 한국은 대만 등과 함께 후발개도국들의 선두주자로써 후발자 이익(latecomer advantage)이 상대적으로 컸던 때문이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