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의 약진은 재벌규제가 개시되던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81년 9월에는 여의도에 연건평 4만8000평에 지상 34층의 쌍둥이빌딩을 착공하였고, 1982년 12월에는 유서 깊은 한국광업제련(장항제련소)의 경영권을 확보하였다. 장항제련소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12월에 조선총독부가 국내 산금(産金) 장려 목적으로 국영기업으로 설립한 조선제련(朝鮮製鍊)에서 비롯되었다. 1935년부터 충청남도 장항에 제련소를 건설하고 금 생산에 착수하였으나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이 됐다. 이후 소유권이 한국산업은행, 대한전선, 풍산금속 등으로 이전되는 와중에서 명칭도 삼성광업, 한국광업제련 등으로 변경되었다. 1982년 온산동제련소와의 통합을 계기로 50%의 유상증자를 단행하였으나 대주주인 대한전선과 풍산금속은 투자매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증자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LG그룹이 증자분 62억1210원을 부담하면서 한국광업제련의 최대주주(53.7%)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LG그룹은 새로 비철금속산업에도 진출하였다. 1980년대에 국제화, 금융업 확장에 주력 1984년 3월에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공장(전남 금성시 송월동)을 인수하여 (주)럭키의 사업부문을 확충하였다. 나주공장은 호남비료의 제2질소비료공장으로 설립, 운영하다가 1982년 5월에 한국종합화학의 옥타놀 공장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부실로 정부는 이 공장을 분리하여 (주)럭키에 매각했던 것이다. 당시 (주)럭키는 제품생산에 필요한 옥타놀의 안정적 확보가 절실했으나 새로 공장을 건설할 경우 최소 500억 원 이상의 건설비와 공사기간만 2년여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수 당시 나주공장은 옥타놀 연 5만5000톤, 부탄올 연 1만여 톤, 이소부탄올 연 7200톤의 최신설비를 갖춘 공장이었다. (주)럭키는 나주공장을 인수함으로서 원료인 옥타놀의 안정적인 공급은 물론 옥타놀, 플라스틱 가소제, 플라스틱 원료, 플라스틱 가공공장을 수직적으로 결합, 국제적 규모의 종합화학 메이커로 도약하게 되었다. (주)럭키는 1984년 9월에 미국 유수의 화공업체인 다우코닝(Dow Corning) 사와 50:50의 비율로 합작, 럭키-DC씰리콘을 설립하고 청주공장 내에 시설용량 2700톤의 실리콘 공장을 건설했다. 건축자재인 실리콘의 국내제조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생산기술과 원료는 다우코닝 사가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실리콘은 첨단의 화공제품으로 197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된 이래 수요가 증가일로에 있는 등 유망사업이었다. 더구나 장기적으로 원료인 Polymer 및 Monomer까지 생산할 수 있어 매력이 매우 컸다. 1985년 6월에는 호남정유가 여수에너지와 정우에너지를 인수하여 규모를 확대하였으며 1986년 7월에는 럭키소재가 대성에탄올을 인수하였다. 한편 전자 부문도 확충되었다. 1980년 7월 금성자판기를 설립하고 1983년 10월에는 금성전선이 한국중공업 경기도 군포공장을 인수, 합병해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1986년 9월에는 일본 히다치(日立電機)와 합작하여 금성히다찌시스템도 설립했다. 그 와중에서 첨단산업에의 진출도 획책하여 1984년 2월에 금성전선이 금성광통신을 설립했다. 같은 해 3월에 금성통신은 의료기기 첨단화 및 전자화 시대에 대비하여 금성의료기를 설립하였다. 금성반도체는 미국 하니웰 사와 컴퓨터 제조기술 도입계약을 체결, 1984년 5월에 금성하니웰을, 1987년 1월에는 미국 EDS와 합작으로 STM(Systems Technology Management Co.)를 각각 설립하였다. 해외진출도 돋보이는데 생산거점 현지화 위주의 국제화작업은 1981년 9월 미국 헌츠빌에 칼라TV 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총 550만 달러를 들여 공장을 완공한 후 1982년 10월부터 칼라TV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시설투자비 6700만 마르크를 들여 독일 보름스 시에 연 40만대의 VCR과 연 30만대의 칼라TV 생산시설을 마련해서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을 뿐 아니라 1984년 6월에는 미국 첨단연구개발 전진기지인 실리콘밸리에 UMI를 설립했다. 신제품 개발 내지는 기존 제품의 품질 향상을 위한 첨단기술 확보가 절실했던 탓이다. (주)럭키는 1984년 3월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합작(SABIC 85%, 럭키 9%, 금성사 6%)하여 자본금 1억2600만 달러의 NPC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설립하였다. SABIC은 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에틸렌 등 화학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기업체였다. NPC는 VCM과 PVC의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1986년에 준공한 생산공장은 연산 VCM 30만 톤과 PVC레진 20만 톤의 생산능력을 확보하였는데 PVC레진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 무렵 LG그룹의 현지 생산거점 확보는 주로 주력기업인 금성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의 수입규제에 대항하고 국내의 재벌규제 강화 등 점차 열악해지는 국내 경영여건을 감안한 글로벌 다각화로 추정된다.
금융부문에 대한 확충도 주목되었다. LG그룹은 1980년 6월에 부산투자금융을 인수하고 1983년 11월에 럭키증권이 대보증권을 인수, 합병해서 규모를 확대했으며 1982년 9월에는 금성투자금융을 설립하였다. 장차 그룹 계열사들의 기업공개를 통한 직접금융 확대와 규제일변도의 은행 의존적 자금조달방식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LG그룹의 금융소그룹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1981년에는 럭키개발이 기업공개를 단행하였고 1984년 7월에는 엘지애드를 설립하여 그룹의 광고 업무를 전담케 했으며 1983년 11월에는 럭키스포츠를 설립하여 스포츠레저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90년 4월에는 안진제약을 인수해서 럭키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5월에는 럭키화이바그라스(럭키오웬스코닝)를 설립하고 6월에는 럭키훽스트(주)를 설립했다. 럭키훽스트는 1993년 1월에 럭키석유화학에 통합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럭키에폭시(주)를 설립하고 12월에는 희성산업이 편의점사업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1991년 1월 희성산업을 LG유통(현 GS유통)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2년 8월에는 ‘LG25’ 100호점을 오픈했다. LG그룹은 1980년대도 수직 및 수평다각화에 주력해서 정상의 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외환위기 극복한 이후 계열분리 가속화 1997년 말에 도래한 외환위기의 충격은 엄청났다. 최정상의 대우그룹을 비롯해 국내 30대 재벌의 3분의 1이 부도로 좌초하거나 공중분해되었다. 전국적으로 2만2000여 개의 기업들이 도산했는데 그중 흑자도산 기업 수만 해도 7000여 곳을 헤아린다. 덕분에 250만여 명의 근로자들이 실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고전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높은 부채비율이 화근이었다. 당시 4대 재벌 부채비율은 1998년 말 현재 삼성그룹(275.7%), 현대그룹(449.3%), LG그룹(341%), SK그룹(354.9%) 등이었다. 계열사들 상호간에 빚보증하는 방식을 동원해 몸집을 불린 결과였다. 이 무렵 초미의 국가적 과제는 기업들의 부채 축소로, 김대중 정부는 재벌들의 슬림화 차원에서 재벌들 상호간에 계열사 맞바꾸기 식의 빅딜(big deal) 작업을 강제로 단행했다. 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되었는데 내용은 삼성, LG, 대우, 현대, 한진 등 5대 그룹에 국한하고 대상사업으론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7개 업종이었다. 그러나 해당 그룹들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으로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서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LG는 반도체를 현대에 넘긴 대가로 받은 자금으로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덤으로 데이콤까지 인수했다. 한화 또한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긴 때문인지 후에 대한생명을 인수해 외형을 불렸다.
LG그룹은 이때 계열분리 작업을 완료했다. 1999년에 LG화재보험을 창업자 구인회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일가에 지분 9%를 매각, 분리했으며 2000년 3월에는 LG벤처투자를 구인회의 4남인 구자두에게, 그해 9월에는 LG아워홈을 3남인 구자학에 넘겼다. 2003년 9월에는 LG전선, LG니꼬동제련,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등 4개 사를 구태회, 평회, 두회 등이 공동으로 인수함으로써 LG전선그룹으로 재탄생했는데 LG전선과 LG칼텍스는 구평회 일가가, 극동도시가스는 구태회 일가가 경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3년 12월에는 LG카드와 LG투자증권이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 넘겨졌는데 이는 LG카드의 부실경영 때문이었다. LG, GS, LS 3개 그룹으로 성공적 분리 마쳐 2004년 4월 13일 (주)LG 이사회는 업종 전문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마지막 계열분리를 결정했는데 LG그룹 계열사들을 연관성이 작은 제조업군과 유통업군으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LG유통, LG홈쇼핑, LG칼텍스정유, LG파워, 서라벌도시가스, 해양도시가스 등은 공동창업자의 허준구의 장남인 허창수 등에 넘겼다. 매출액 18조 원의 이 사업군은 2004년 7월부터 지주회사 GS홀딩즈의 지배체제로 전환했다.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는 LG그룹과 셰브론의 자회사인 미국 칼텍스가 1967년 5월에 공동으로 설립한 정유회사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에너지를 공급하여 왔다. 석유 및 석유화학 생산시설을 바탕으로 전력, 도시가스, 유전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등의 사업 분야를 갖고 있다. GS그룹과 셰브론이 각각 5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GS리테일은 GS홀딩스의 유통전문회사이다. 1974년 슈퍼마켓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슈퍼마켓, 편의점 등 사업을 하고 있다. ㈜GS홈쇼핑은 TV홈쇼핑, 인터넷쇼핑, 카탈로그쇼핑 등 온라인쇼핑사업을 주업으로 영위하는 회사이며, 1994년 12월 (주)한국홈쇼핑으로 출범하였다. 2009년 11월 1일부터 TV홈쇼핑(GS홈쇼핑)과 온라인 쇼핑몰(GS이숍), 쇼핑 카탈로그(GS카탈로그), T커머스(GS티숍) 등 4개 사가 하나로 통합되어 GS SHOP이라는 브랜드가 되었다. GS강남방송, GS울산방송, 디앤샵, GS텔레서비스 등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으며, 2005년 중국 중경에 중경가시구물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중국시장에 진출하였다. 현 사장은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동생 허태수이다.
“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이 말은 형제나 친구간이라 해도 결국은 의를 상하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 동업의 한계로 알려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LG그룹의 구씨와 허씨 가문은 2세대 57년에 걸친 동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일반의 상식을 뒤엎었다. 한국기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업경영으로 기록, 평가될 것이다. 이로써 LG그룹은 (주)LG, LG전자, LG화학, LG엔시스, LG MRO, 곤지암레저, LG스포츠, LG경영개발원 등 총매출 67조 원의 29개 사로 슬림화하는 한편, 7월부터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했다. 계열분리로 LG그룹의 위상은 다소 축소된 것이다. LG그룹은 매출액 기준으로 재계 서열은 삼성, 현대에 이은 부동의 3위에서 2010년에는 SK그룹에 이어 4위로 내려앉은 것이다. 그럼에도 LG그룹의 매출액은 1997년 38조3000억 원에서 2010년에는 GS그룹 등이 계열분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8조9000억 원으로 무려 2.6배나 신장했다. LG그룹의 위상이 재확인되는 것이다. 한편 상위 15대 재벌의 계열사 총수는 1996년 현재 413개에서 2010년에는 671개로 1.6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삼성은 49개에서 67개로 늘어난 반면에 SK는 32개에서 75개로 2배 이상 불어났다. LG는 48개에서 53개로 약간 늘었으나 같은 계열인 GS, LS를 포함하면 168개로 최고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