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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맞아 ‘대통령學’ 공부해볼까

역대 대통령의 공·과 보면 2012년 정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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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3호 최영태⁄ 2012.09.24 13:09:43

투표를 하고파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3인 중 누구를 뽑아야 이제 좀 살만한 세상이 되려나 하는 마음에서다. 과거 한국의 대선에선 스케일이 크고 허황된 공약이 자주 나왔다. 새 대통령만 뽑으면 모든 난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 국민들의 무망한 기대를 대선후보들이 이용해 먹고는, 일단 청와대에 들어가면 “대통령 되려면 무슨 공약인들 못하겠나”며 오리발을 내미는 사기극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선 이런 게 적다. 그만큼 한국 유권자도 이제 허황된 공약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만큼 약아졌기 때문이다. 일부 후보의 역사관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미래를 선택하려면 역시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 역대 대통령을 분석한 이른바 ‘대통령學’ 책들을 읽어볼만한 이유다. 그간 나온 대통령학 관련 책들을 두 차례에 걸쳐 둘러보며 2012년의 정답을 찾아본다. 이승만: 건국은 잘했지만 개인 욕심이… 윤여준은 ‘대통령의 자격’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 “건국 시기의 대외적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 통치리더십)는 매우 탁월했지만, 집권 뒤 일상적인 스테이트크래프트에서는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즉, 남북한을 외국 군대가 나눠서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를 세워야 하는 초창기에는 이승만이란 ‘미국을 잘 아는’ 인물이 있었다는 게 한국인에게 행운이었지만, 일단 나라가 세워진 뒤에는 인사 실패, 개인적 과욕 등으로 통치 리더십 발휘에 실패했다는 의미다. 건국기에 이 대통령이 탁월했던 점은 △미국 주류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이 체제선택(미국이냐, 소련이냐)임을 간파하고 자유민주 체제를 선택했고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미군정이 추진한 농지개혁에 찬동함으로써 지주층의 몰락을 촉진하고 산업화-민주화의 장애물을 없애는 진보성을 보여줬으며 △남한을 일본의 배후 정도로 여기는 미국의 태도에 대해 ‘남한 단독의 북진통일론’ 등을 주장함으로써 한미방위동맹을 맺었고, 이는 이후 60년 동안 한국인들이 안심하고 산업화(박정희)와 민주화(3김)에 매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줬다는 칭찬이다.

그러나, 일단 한미방위동맹을 맺고, 선거에서 승리하자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에 기대면서 특권계급의 기존 이익만을 옹호하는 정경유착에 빠졌다. 인사 실패로 측근이 횡행하고, 사사오입 개헌 같은 희화적 작태로 국민의 비웃음을 사는 대통령이 되고 만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현재 평가는 판단자의 정치적 지향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북한과의 체제비교에 집착하는 보수 세력은 “나라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는 반면,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진보 쪽에서는 “친일파를 대거 등용해 나라의 기틀을 망친 독재자”로 폄하한다. 판단 축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대통령이다. 박정희: 산업화 이끌었지만 결과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래서 아직도 공과 과에 대한 평가가 끝나지 않은 대통령이 박정희다. 윤여준은 자신의 책에서 박정희 정권의 일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강렬한 공적 열망, 치열한 문제의식, 개인적-물적 욕망을 자제한 청렴하고 헌신적인 자세, 현장을 장악하면서 끊임없이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오늘날에도 귀감”이라고 추켜세운다. 역대 최고의 통치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윤여준은 4.19와 5.16을 “두 선진 집단, 즉 학생과 군부가 순차적으로 반발과 대응을 한 것이며, 민주화-산업화의 두 측면의 시작을 각각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60년대 초반 한국에서 가장 앞선 집단인 대학생과 군부가 각각 발기한 두 사건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시발점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철저한 합리적 기회주의자. 잇단 ‘카운터펀치’로 영구집권 확보했지만 유신체제 들어 기민성 떨어지면서 몰락. 박정희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경제에 올인’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심리학 차원에서 박정희를 분석한 전인권은 ‘박정희 평전’에서 “박 대통령의 연두교서 등을 보면 대통령의 연설이 아니라 경제전문가의 보고서 뺨칠 정도로 지루할 정도로 경제 수치들이 많이 인용돼 있다”고 썼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경제에 집착하는 태도였다. 박 대통령이 채택한 정책은 불균형 성장 정책이었다. 한정된 자본과 자원을 재벌이라는 특정 사업자들에게 나눠주고, 국영 은행의 통제 아래 정부가 지정한 사업을 재벌들이 진행하도록 하면서, 수익을 보장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반발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억압 정책으로 맞섰다. 그 결과는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현실, 즉 재벌의 공룡화와 대부분 노동자의 “못살겠다”는 한탄이다. 물론 현재의 양극화에 대해서는 “박정희 책임”이라는 비판론과, “아니다. 박정희 때는 양극화가 없었고 1987년 민주화 이후 대기업-공기업의 임금만 인상되고 나머지 분야는 그렇지 못해 그렇다”는 두 가지의 의견이 엇갈린다. 박정희의 공과 과에 대해서는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말 그대로 “아직도 역사의 평가가 끝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에 대해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수긍하는 측면이 있다. 바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아주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저서 ‘대선 2012, 어떤 리더십이 선택될 것인가?’에서 박정희를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의 인물’로 꼽는다. 기회가 생기면 철저히 그 기회를 이용하고, 역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되치는, 철저히 기회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는 지적이다. 임 교수는 박정희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사례로 △1971년 총선에서 사실상 야권에 패배한 뒤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자 이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발동에 이용했으며 △70년대 초 금융위기를 초헌법적인 8.3경제조치 발동에 이용하고 △70년대 초 안보 위기가 시들해지자 의제를 재빨리 통일 논의로 전환해 국민들의 기대심리를 부풀려 놓은 뒤 전격적으로 유신체제를 가동시킨 일 등을 꼽았다. 경제개발 초기에 주류 경제학자의 추천에 따라 수입대체 산업에 나섰다가 난관에 부딪히자 당시 수출 호조에 주목해 1963년이 지나면서 바로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전환해 성공을 거둔 것도 기회에 강한 면모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순발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 상황에 빠진다. 정부 차관을 지원받은 업체 83개 중 45%가 부실기업이라고 1969년에 정부가 고백할 정도로 불균형 성장정책은 부실기업의 덫에 걸려버린다. 중소기업-노동자를 희생시키면서 재벌에 몰아준 돈이 상당 부분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또한 70년대 말에는 자주국방을 목표로 추진된 중화학공업 편중투자로 경공업이 부실해지면서 소비재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중동건설을 통한 달러 대거 유입으로 숙련노동자의 임금이 대폭 올라가고 물가는 앙등하면서 율산 등 신흥재벌이 도산하는 등 박정희 경제 체제는 붕괴 양상을 보인다. 한창 때의 박정희라면 이런 위기를 기회로 받아치는 통치력을 발휘했겠지만, 유신체제로 영구집권을 확인받은 그는 집권 말기로 갈수록 ‘헤게모니 없는 독재’, 즉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지배에 머물면서 결국 친구이자 최측근인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전성기 때의 박정희는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집단의 자문을 구하는 한편, 그들을 직접 기용하여 경제정책을 기획-집행하게 함으로써 국가와 시민사회(기업가, 기업단체, 지식인) 간의 심의를 활발히 추진했다. 시민사회와의 협업이 박 정권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 이후 승리에 도취해 이런 협업이 형식적 수준에 머물면서 몰락했다는 평가다. 고령 세대 중에서는 아직도 ‘박정희의 경제 모델’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그 모델은 “더 이상 작동 불가능한 모델”이라는 게 공론이다. 철저히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시중 금리와 비교도 안 되게 싼 차관자금을 특정 기업에만 몰아주는 ‘재벌 지원 불균형 개발전략’을 민주화시대에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란 각 정당을 통해 갈등이 표출되게 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시스템인데 박정희 식 경제를 운용하려면 불평을 말하는 반대파-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흉내를 내려는 듯한 이명박 정권의 ‘재벌 편중지원, 근로자 탄압’ 정책이 경제에 마이너스만 될 뿐이라는 현실을 한국인들은 그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에 향수를 갖는 사람에게는 “옛날 애인은 상상 속에 머물 때가 최고이고,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이유다. 전두환, 경제는 ‘게으르게 맡겨’ 최고 실적 챙겨. 정치는 ‘무식하면서도 직접 챙겨’ 최악 성적 전두환: 경제만 아니라 정치까지 맡겼다면… 광주의 민주화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집권한 불의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업적은 “역대 최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전 대통령이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면서 경제를 일임했기에 가능했다.

지주형 교수는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에서 김재익 등 전두환 시대의 경제관료들을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처음 본격적으로 도입한 인물들”로 꼽는다. 70년대 말 붕괴 양상을 보인 박정희 경제모델의 한계에 대해 당시 경제관료들은 세계를 풍미하던 신자유주의를, 전두환 대통령의 엄호 아래 적극 도입하면서 물가안정을 기하고, 그 결과 1986년에는 한국사상 최초로 국제수지 흑자를 달성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라면 악의 화신 정도로 생각하는 시각이 많지만. 전두환 당시 경제를 보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플러스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시효를 다한 박정희 경제모델에 수정을 가해 한국 경제를 살려낸 것이 전두환 시대의 신자유주의 도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제에서 성공한 전두환이지만, 그러나 능력이 안 되는데도 “정치는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나서면서 형편없이 망가진다. 광주사태라는 불의의 출발을 했으면서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앞뒤가 안 맞는 구호를 남발해 비웃음을 샀다. 또한 능력보다는 인정과 의리, 즉 일차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정실주의 가치관으로 측근의 부정부패가 속속 불거졌다. 이를 윤여준은 “정치에서는 무식하면서도 부지런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임혁백은 저서에서 독일의 장군 폰 몰트케의 리더십 유형 분류에 따라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을 구분한다. 이 분류법은 똑똑함과 부지런함을 근거로 지도자의 유형을 4가지로 나누는데, 최선은 ‘똑똑하고 게으른(아랫사람에게 일을 위임하고 그들과 잘 소통하는)’ 리더십이고, 최악은 ‘무식하면서 부지런한’ 리더십이다. 정치에 직접 나선 전두환 대통령에게 적용할만한 분류법이다. 그래도 전두환 대통령은 수십만 시위대가 거리로 나선 6월 항쟁 국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았고, 6.29선언이라는 절묘한 카드를 내놔 마무리를 잘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6.29선언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속으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경쟁을 유발하고, 이들의 경쟁을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주의에 묶어 놓음으로써 그 후 25년간 한국 정치를 지역구도라는 질곡에 가두고, 그 틈을 타 수구 지배층이 안전하게 권력을 차지하는 달콤함을 맛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 한발 물러났기에 성공한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고 치적은 군사독재에서 문민정권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무난히 마친 것이 꼽힌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정관용 엮음 ‘문제는 리더다’에서 “노태우는 유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받을 만한 요소가 생겼다.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전환을 부드럽게 했던 것은 노태우가 무해무득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악바리에 똑똑이였다면 쉽게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책에서 박근혜캠프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역시 “인천공항, KTX, 경기도순환도로 같은 사회간접시설이 노태우 때 다 만들어졌으며, 미국의 한 저명인사는 ‘외교에 가장 성공한 한국 대통령은 노태우’라고 평가했다”고 밝혔다. 임혁백 교수 역시 “몰트케의 리더십 분류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스마트하지 않으면서 게으른 리더’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조직을 보전할 수는 있었다”고 평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는 리더십이 좋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노 전 대통령의 경우다. <다음 호에 계속>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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