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辛格浩)는 1922년 10월 4일에 경남 울산에서 20여 km나 떨어진 산골 마을인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377에서 빈농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29년 4월에 4년제이던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 4월에 읍내에 있는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의 5학년에 편입하였는데 당시 그의 학업성적은 57명 중 42등이었다. 공부엔 별로 뜻이 없었던 모양이다. 1935년 3월에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신격호는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던 중 큰아버지 신진걸의 도움으로 1936년 4월 언양에 있던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하였다. 2년제였던 울산농업보습학교에서도 학업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별로 크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으며 행동도 신중했는데 특히 그는 바둑을 즐겼다.(정순태 저 ‘신격호의 비밀’, 1993, 지구촌, 5159면) 도일과 실업계 학교 지망으로 징병 면해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신격호는 18세 되던 해에 경남 양산에 있는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하였다. 업무는 양털 깎기와 양돈 등이었으나 박봉이었다. 이 무렵 이미 결혼한 신격호는 19세 때인 1941년에 홀로 적수공권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도 벌고 못다 한 공부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도쿄에 도착한 신격호는 그곳에서 고향친구들을 찾았다. 스기나미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음날부터 우유배달을 하는 한편 대학진학을 위해 와세다중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었다. 신격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를 선택했다. “한창 전쟁준비에 부산할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공과를 지망하게 되었는데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3류 문사(文士)쯤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이종재 저 ‘재벌 이력서’ 171면)
학업 중인 1944년에 그에게 사업기회가 주어졌다. 고학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신격호를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일본인 하나미쓰 노인이 어느 날 찾아온 것이다. 신격호는 한때 하나미쓰가 운영하던 전당포와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신임하고 있었다. 하나미쓰는 신격호에게 군수용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의하였다. 커팅오일은 기계를 연마하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윤활유였다. 소요자금 6만 엔은 하나미쓰가 전액 출자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당시 일류 회사원의 한 달 월급이 80엔에서 100엔 정도로 6만 엔은 거액이었다. 신격호는 하나미쓰의 제의를 받아들여 도쿄 아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서 사업에 착수했으나 가동도 하기 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하치오지 부근에 새로 공장을 마련해서 생산에 착수, 1년여 운영하는 동안 사업은 잘 되었다. 그러나 이 공장 또한 미군기의 폭격으로 문을 닫았다. 따라서 사업자금 6만 엔은 고스란히 신격호의 빚으로 남았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직후인 1946년 5월에 도쿄 스기나미구 오구보 4의 82에 있는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새로 사업장을 차렸다. 전쟁 중 공습으로 절반 정도 파괴된 형편없는 벽돌집이었다. ‘히까리(光)특수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 사업에 착수하였다.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乳脂)제품을 생산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의 전쟁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생필품이 상당히 귀했다. 일용품은 특히 품귀현상이 심해 신격호가 생산한 제품은 출하되자마자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납품과 수금을 위해 하루 평균 200곳의 납품처를 돌아다닐 정도로 바빴던 탓에 공장 운영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 엔을 전부 상환할 수 있었다. “신 회장은 이때 사업의 묘미를 터득했다고 한다. 즉, 시의적절한 상품개발, 수요예측,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 등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6일 ‘人物탐구’) 2엔짜리 ‘풍선껌’으로 대박, 그리고 위기 히까리연구소가 성업 중일 때 신격호에게 또 하나의 사업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는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일본에는 1945년 미군의 진주와 함께 초콜릿, 통조림, 담배, 츄잉껌 등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1946년부터 풍선껌이 대유행했다. 어느 날 풍선껌을 만드는 친구가 찾아와 신격호에게 풍선껌 제조를 권했던 것이다.
당시 풍선껌은 비행기의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塗料)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향료 등을 추가하여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가 가능했다. 가마솥과 요리용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는 350개 내지 400개의 풍선껌 제조업자들이 난립했다. 더구나 껌은 과자류에 비해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판매가격의 무려 50% 정도가 이익으로 남았기 때문에 잘만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27세 청년 신격호는 1947년 4월부터 껌 제조에 착수하였다.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하였다. 신격호가 만든 2엔짜리 풍선껌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시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자신을 얻은 신격호는 풍선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한편, 1948년 6월에 (주)롯데를 설립하였다. ‘롯데’라는 상호는 신격호가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롯데는 신격호가 사모하던 상상속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롯데는 신격호의 탁월한 마케팅능력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당시 최고 스타 여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광고모델로 사용하는가 하면 2엔짜리 껌에 1000만 엔의 상금을 거는 ‘1000만 엔 천연치클껌 대판매’ 이벤트를 실시해 일본 소비자들의 관심을 유발하였다. 이후 롯데껌은 점차 전국으로 수요가 확대되면서 일본 껌 시장을 잠식해 갔다. 껌 제조사업 4년 만에 신격호는 성공한 제일교포 사업가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껌 시장이 확대되면서 경쟁 또한 점차 치열해졌다. 1956년에는 세계 최대의 껌 메이커인 미국 리글리(Wrigley)가 일본에 상륙, 롯데는 설립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는다. 세계 최대의 츄잉껌 제조업체인 리글리의 출발은 창업자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W. Wrigley. Jr)가 1891년에 껌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당초 리글리는 부친이 제조한 비누판매를 계기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마차를 타고 도시를 전전하면서 비누 세일즈에 나섰는데 판매가 부진한 때는 베이킹파우더 같은 광고용 선물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후 베이킹파우더의 수요가 비누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베이킹파우더 판매에만 전념했다. 그는 베이킹파우더를 더 많이 팔기 위해 껌 2통을 덤으로 끼워주었는데 소비자들에게 껌이 훨씬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초의 리글리 껌 상표는 1892년에 나온 로타(Lotta)와 베서(Vassar)였다. 1년 뒤 리글리는 오늘날에도 판매되고 있는 브랜드인 주시 프루트(Juicy Fruit)와 스피어민트(Spearmint)를 내놓았다. 그는 신문광고와 대대적인 플래카드로 자신의 껌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또한 수많은 도시를 순회하며 판촉용 껌 선물공세를 편 결과 1910년 캐나다, 1915년 오스트레일리아, 1927년 영국, 1939년 뉴질랜드 등에 현지공장과 지사를 설치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서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유럽을 석권하는 유명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롯데와 리글리는 일본 껌 시장 석권을 위해 10여 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는데 1966년에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부터 롯데는 일본 껌 시장의 최대 강자로 우뚝 섰다. 신격호는 껌 제조사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1959년 2월에 자본금 2000만 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했다. (주)롯데 제품의 판매를 전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1961년부터 초콜릿 제조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일본의 초콜릿시장은 메이지제과와 모리나가제과가 석권하고 있었는데 후발업체인 롯데가 이들의 아성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롯데는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능가하기 위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초콜릿 제조기술자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설비를 확보하고 1964년부터 ‘VIP초콜릿’이란 상표로 시장공략에 나섰다. 그 결과 1968년 당시 롯데는 연매출 700억 엔에 종업원 3000여 명의 일본 최대의 종합과자 메이커로 성장하였다.
모국에서 사업은 형제간 골육상쟁으로 시작 국내 대부분의 재벌들은 창업에서부터 대규모 기업집단을 형성할 때까지 국내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토착자본이다. 그러나 롯데는 일본에서 창업하여 그곳에서 형성한 부와 경영기법을 국내에 도입해서 재벌을 형성한 독특한 이력의 기업집단이다. 롯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65년 12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부터였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단절된 한국과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문제는 1961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는데 국교정상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한 쪽은 국내 기업인들이었다.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구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중심이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외화 확보에 혈안이 되었는데 대안의 하나로 일본자본을 국내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국내에 일본 자본의 진출이 격증했는데 이를 계기로 신격호도 국내에서의 기업활동에 착수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신격호는 형제들 간에 골육상쟁을 겪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신격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철호(轍浩)는 1959년에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주)롯데와 롯데화학공업을 설립하고, 둘째 아우 춘호(春浩)를 끌어들여 껌과 캔디, 비스킷, 빵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신격호가 모국에서의 사업발판을 마련할 목적으로 기존의 (주)롯데와 롯데공업을 정리하려 하자 동생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주식 지분 문제로 철호가 신격호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등 형제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그 결과 철호는 캔디와 비스킷 부문을 분리해서 새로 메론제과를 설립했으며, 춘호는 라면제조업체인 롯데공업을 차려 각각 분가했으나 신격호가 ‘롯데’란 상호 사용을 불허하는 바람에 (주)농심으로 변경했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