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최재은(59)이 인간과 하늘에 주목한 작품을 가지고 한국을 찾았다. 최 작가는 1986년부터 흙, 나무 같은 대지의 지층이 내포한 영원성과 생명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7개국 11개 지역에 수년간 묻은 뒤 꺼내어, 각기 다른 변화를 통해 기록된 시간을 보여주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를 펼쳤다. 최 작가가 2007년 로댕갤러리 이후 5년 만에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10월 2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오래된 시(詩)' 개인전을 마련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들은 대지가 아닌 무한한 하늘을 모티브로, 유한한 인간과 빛의 시간적인 추이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어떤 리얼타임 속도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한성과 유한성이 충돌하는 순간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죠." 전시장에 걸린 작품 '유한성(finitude)'에 대한 설명이다. 각기 다른 세 방향의 하늘을 해질 무렵부터 새벽녘까지 8시간 동안 촬영한 영상 작품으로, 독일 스토르코프의 밤하늘을 촬영한 3개의 영상과 직접 걸으며 나온 발자국 소리를 담았다.
우리가 보는 하늘의 별은 광년 단위의 거리에 존재하는 빛의 반영을 보는 것, 즉 아주 오래 전 과거의 빛을 현재 인식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객관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억 광년을 지나온 별이 남겨 놓은 시간성, 이를 영상에 담는 작가의 시간성, 그리고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간성을 동시에 중첩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단면들은 끊임없이 반복하고 순환하면서 매번 새로운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최 작가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러한 시간의 중첩된 구조를 지각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 시(verse)의 가능성과 경험을 창조해낸다. 태양이 솟아오르는 장면을 1분 간격으로 촬영한 일출 사진 50점도 눈길을 모은다. "이탈리아의 조그마한 바닷가에서 일출을 촬영했죠. 태양이 프레임으로 들어와 나가기까지의 110분을 촬영해 이 중 50분의 시간을 담은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단어와 문장들을 짧은 시구들처럼 그려서 보여주는 25점의 드로잉 '만물상'을 통해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단어와 문장을 정리했다. "그날 발생했던 일들 중 가장 인상적인 느낌이나 사물을 접했을 때 관계성 등에서 한 단어씩 만들어 냈다"며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글을 적었는데, 너무나 자유스러운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원래 의상 디자이너의 꿈을 가지고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갔다. 현지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꽃꽂이를 접하면서 공간과 시간성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당시 최 작가가 수학한 소게츠 회관은 일본 전위예술의 상징적인 곳으로,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펼친 장소로 알려졌다. 최 작가는 식물, 물, 공기, 불, 땅과 같이 가공되지 않은 재료를 작업에 차용하는데, 여기에는 공간적인 개념과 소게츠파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유기적 형태의 공간성에 대한 배움은 최재은의 시각 예술 실행에 근거가 됐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