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趙重勳)은 1920년 2월 11일에 서울에서 조명희(趙命熙)의 4남 4 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휘문고보 1학년을 중퇴한 후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수료하고 1937년에 화물선 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전문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로서 천진, 홍콩, 상해 등 외국을 돌며 해외에 대한 견문을 넓힐 기회를 얻었고, 그 과정에서 외국 상인들의 상술을 견문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1939~45)이 확전되면서 중국 상해에서 8개월간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그곳에서 활동하던 유태인과 중국 상인들을 관찰하면서 그들 특유의 상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견문 넓힌 후 창업전선에 뛰어들다 1942년 여름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그간 모아둔 자금으로 인천부두 인근에 이연공업사(理硏工業社)를 설립하였다. 엔진보링 및 재생전문 업체였는데 당시 자동차들은 연료를 목탄(木炭, 숯)으로 사용한 탓에 잦은 정비를 받아야 했다. 당시에는 일제가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석유류에 대한 민간공급을 제한한 탓에 자동차 운수업체들은 대용으로 목탄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중훈은 제대로 훈련받은 기관전문 기술자였기에 이연공업사는 밀려드는 일거리로 승승장구했으나, 1943년 8월 ‘기업정비령’에 의해 일본 마루베니(丸紅)사에 강제로 징발당했다. 기업정비령이란 태평양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자원배분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1942년에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중소기업들을 대기업에 강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취한 법령이다.
이 무렵 일제는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전장에 투입하였다. 또 다른 젊은이들은 일본 본토를 비롯한 남양의 일본군 점령지 부역노동에 징발되기도 했다. 조중훈은 기술자였기 때문에 강제징집을 당하는 대신 해방 무렵까지 군수품 생산공장인 서울의 용산공작창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조중훈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에 인천시 해안동(현 항동) 4가 3번지에 사무실과 트럭 한대를 마련해서 합자회사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형인 조중열(趙重烈)과 조중훈의 둘째 처남인 김건배(金建培)가 참여하였는데 조중열, 김건배는 유한책임사원이었고 조중훈은 무한책임사원이었다. 한편 서울 영등포에 있는 대한산소(大韓酸素)의 인천총대리점 영업도 겸했는데 사업은 날로 번성했다. 조중훈은 신용을 철저히 지켰을 뿐 아니라 고객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 또한 그는 트럭을 구입할 때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트럭엔진과 같은 제품의 엔진을 장착한 차량들만 구입했다. 예비엔진을 확보했다가 문제발생 시 즉각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한진상사는 창업 2년 후인 1947년 10월에는 보유트럭이 15대로 늘어날 정도로 급성장했다.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수송사업면허(交陸事免貨 第148號)도 획득했다. 그 결과 창업 5년째인 1950년에는 종업원 40여명, 트럭 30대와 화물운반선 10여 척을 보유한 중견 화물운송업체로 도약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조중훈의 사업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가 인천으로 돌아온 때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머물렀던 1953년 봄이었는데 인천 시가지가 통째로 폐허화되었던 것이다. 한진상사 건물도 사라졌다. 한진상사 간판을 걸고 사업을 재개했는데 그가 닦아놓은 기반 때문에 비교적 수월했다. 그 결과 한진상사는 1955년에는 한국전쟁 직전의 규모로까지 사업이 확대되었다. 이 무렵 조중훈은 인천항에 하역되는 막대한 분량의 주한미군 군수물자 수송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당시 미 군수물자가 수송과정에서 도난을 당하는 등 피해가 속출해서 미군은 한국인 운수업자들을 불신했던 탓에 미군과의 접촉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조중훈은 각고의 노력 끝에 미8군 수송담당관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조중훈이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은데 대해 “운수가 좋았다는 말도 있었고, 정치권과 줄을 대고 있다고도 했다. 또 트럭을 운전하다 고장난 미군 고위층 부인의 차를 고쳐주어 인연이 닿았다는 말이 나돌았으며 미군 고위층을 잘 아는 여동생의 도움이 컸다는 말도 있었다.”(이종재, 재벌이력서, 181면) 미 군수물자 수송용역으로 사업 기반 터 잡아 조중훈은 1956년 10월 미군 고위층을 찾아 군수물자 수송용역을 맡겨줄 것을 교섭하였다. 미군과의 계약 자체가 매우 어려웠던 탓에 그는 ‘책임제 수송계약’을 제의하였다. 즉, 운송도중에 발생하는 일체의 사고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한진상사가 변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중훈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1956년 11월 1일에 계약이 성사되었다. 당시 한진이 담당하는 업무는 미군용 캔맥주를 납품업체로부터 부평 인근의 부대까지 수송하는 것으로 전체 미 군수물자 수송량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계약기간은 1956년 11월 1일부터 1957년 4월 30일까지 6개월간이었으며 용역대금은 7만 달러였다. 운반용 화물차에 소요되는 유류비는 미군이 별도로 현물로 지급하기로 하였다. 어렵게 미군과의 계약을 성사시킨 조중훈은 신용만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각오로 성실히 수송 업무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의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다지는 데도 각별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불거졌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 파카를 아예 차떼기로 남대문시장에 팔아넘긴 사고가 발생하였다. 용역사업 초기여서 제대로 이익을 내기도 전인 데다가 어렵사리 미군들의 신용을 얻어가고 있던 때라 참으로 난감했다. …중략… 어찌된 셈인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수령처로부터 물건을 받았다는 담당관 사인까지 받아왔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본다면 굳이 변상을 안 해도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 직원 한 명을 남대문시장에 상주시켜 놓고 물건이 나도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5일쯤 지나자 분실된 물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중략… 장물을 취득한 상인에게 …중략… 이문(利文)까지 보태주어 1300벌에 달하는 파카 전부를 되사 수령처에 인계했다. 금전적으로 큰 손실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 확고한 신용을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조중훈, ‘내가 걸어온 길’, 1996, 나남, 33면)
수송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한 결과 1957년에 재계약을 성사시켰는데 2차 계약시 수주금액은 10만 달러였다. 1957년 1월 한진은 자본금 1000만 환의 한진상사주식회사로 재발족하였다. 5월에는 본사를 서울 을지로 1가의 반도호텔로 이전, 인천 시대를 마감하였다. 이후에도 미 군수물자 수송사업은 계속되어 1958년의 미군사업 수주액은 전년도의 3배에 해당하는 3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미군 사업이 확대되자 조중훈은 이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1959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던 동생 조중건(趙重建)을 불러들여 경영에 참여시켰다.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 실력과 유연한 대인관계로 미군 사업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중건의 참여를 계기로 1959년의 미군 사업 수주액은 100만 달러를 기록하였고 1960년에는 무려 220만 달러로 확대되었다. 220만 달러는 1960년 우리나라 총 수출액(3280만 달러)의 6.7%로 매우 큰 금액이었다. 당시 한진의 수송능력은 임대차량을 포함, 가용차량이 500대에 달했다. 배트남 진출로 재계의 전면에 급부상 1965년에 베트남전이 점차 확대되자 미국은 막대한 전비(戰費)를 투입했다. 당시 조중훈은 베트남에 진출할 것을 구상했는데 한국일보 창업자이자 경제기획원 부총리인 장기영(張基榮, 1916~1977)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파월 한국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한진이 맡으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1965년 8월 15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중건과 함께 미 국방부의 고위 장성들과 접촉하면서 베트남 주둔 미 군수물자의 수송계약 교섭을 전개했다. 교섭에는 일찍이 조중훈이 미8군을 드나들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급 장교들이 동원되었다. 사업가능성을 확인한 조중훈은 1965년 12월에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 자격으로 경제시찰단을 구성해 베트남을 방문하여 사이공, 퀴논 등 중요 항구들을 견학하고 퀴논항을 사업장으로 정했다. 당시 퀴논항에는 한국군 맹호부대가 가까이 있어 안심되었던 것이다. 1966년 1월부터 계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미 국방부는 계약과 동시에 쌍방보증금으로 300만 달러를 예치하고 75일 이내에 소요되는 모든 수송장비를 준비하면 계약에 응하겠다고 했다. 조중훈은 300만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장기영 부총리를 찾아 협조를 부탁, 600만 달러의 정부지불보증을 받았다. 예탁금 300만 달러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 고위층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수송 작업에 필요한 트럭 180대, 바지선, 예인선, 지게차 등 300여 점이 넘는 장비는 일본 최대의 군납업체인 국제흥업 사사키(小佐野賢治) 사장에게 부탁해서 모든 준비를 끝냈다.
1966년 3월 10일에 주월 미군수품 수송용역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기간은 1966년 5월 25일부터 1년간으로 하고 용역대금은 725만 달러로 당시 한국 업체들이 베트남에서 수주한 금액들 중 최고액이었다. 한진이 담당한 업무는 베트남 중부 지역에 산재한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 미군 사단 등 5만 병력에 대한 전략물자와 식료품을 퀴논항에서 하역하여 목적지별로 육상운송을 하는 일과 안케에서 중부 고원지대의 전략도시인 플레이크를 경유, 퀴논으로부터 약 200마일 거리의 듀크까지 주요 화물을 왕복수송하는 것이었다. 작업 내용은 항만 하역, 항만 터미널 운영, 육상운송, 내륙 장치장 운영, 장비 정비 및 도선 업무 등이었다. 베트남사업은 1966년 4월 27일부터 개시되었다. 조중훈은 한국인 근로자들을 진두지휘, 휴일도 없이 수송 업무를 강행하여 미군 수송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한진의 수송단은 월맹군의 표적이 되어 위험이 상존했다. 그럼에도 한진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1차 용역계약이 끝날 무렵인 1967년 5월에는 3400만 달러의 재계약을, 1968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한진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베트남에서만 총 1억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 총액이 수천만 달러인 점을 감안할 때 엄청난 금액이었다. 베트남 진출은 한진그룹이 재계의 전면에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운송사업과는 불가분의 동양화재보험 인수 동양화재보험은 1921년 12월 15일에 조선식산은행과 일본인 기업가 정본등차랑(釘本藤次朗), 대지충조(大池忠助), 마장가장(馬場嘉藏) 등 일본인 실업가들과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朴泳孝), ‘을사 5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의 조카 한상룡(韓相龍) 등에 의하여 자본금 500만 원의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로 출발하였다. 조선화재는 일제하에서 일본 최초의 손해보험회사인 동경해상(東京海上)의 자본지배를 받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귀속재산이 됐다. 1950년 3월 상호를 동양화재해상보험으로 변경하고 귀속재산 민간불하 방침에 따라 1955년에는 이화학당에 불하되었다. 이후 이 회사는 우여곡절을 거쳐 1963년 5월 22일에 삼성그룹에 소유되었다가 장기영 부총리의 중계로 1967년 7월 18일에 한진그룹이 5억7000만 원에 인수했다. 한진은 베트남 사업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 결과 국내 최대의 현금 보유 기업으로 평가되었는데 여유자금 관리 및 운용 필요성이 제고되었다. 또한 주력사업이 수송업인 탓에 위험이 상존하여 손해보험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월 기술자들에 대한 근로자 재해보상 책임보험에 가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진그룹에 인수된 후 동양화재는 고려화재, 안국화재 등을 제치고 업계 수위를 고수하였는데 이는 당시 한진의 베트남사업 및 국내 계열사들의 보험물건 등이 적지 않은 때문이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