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우유 및 유음료와 아이스크림 및 과자류를 제조, 판매하는 유가공 처리업체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계열 분리됐다. 1979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82년 빙그레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4년 진로종합식품의 유가공사업을 인수해 덩치를 키웠던 것이다. 김승연 회장의 남동생인 호연 몫으로 분리된 것이 그 이유였다. 이로써 한화그룹의 2세 승계작업이 일단 종료됐다. 2010년 현재 빙그레는 자산 4746억 원에 매출 6849억 원을 기록한 굴지의 종합 제과업체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한화의 약진은 계속됐는데, 2000년에는 대전시 서구 둔산동에 있는 동양백화점(현 한화타임월드)을 인수했다. 1979년 5월 국종산업사(주)로 설립되어 1980년 11월에 동양백화점을 개관했다. 1996년 1월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1997년 9월에는 대전 둔산점 타임월드를 개점했다. 총 3개 동에 층별로 명품, 패션잡화 및 의류, 가전, 생활용품, 식품 등을 판매하고, 스포츠센터(수영장, 헬스장, 스쿼시장, 에어로빅장)와 문화센터(소극장, 문화교실, 갤러리, 멀티플렉스 영화관)를 운영하다가 2000년 2월 한화그룹에 인수되어 2007년 1월에 (주)한화타임월드로 상호를 변경했던 것이다. 2010년 9월 현재 최대주주는 (주)한화갤러리아로 69.4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에 한화기술금융과 대덕테크노밸리를 각각 설립했다. 대덕테크노밸리는 2001년부터 9년간의 사업기간을 거쳐 2009년 11월에 준공했다.
계열분리와 보험사 인수로 금융부문 강화 2001년 4월에는 (주)한화의 그룹종합운영 서비스사업을 분사해 토털IT서비스 전문의 한화S&C(Hanwha S&C)를 설립했다. 이후 사업을 확대해 IT컨설팅, IT아웃소싱, SI(System Integration), NI(Network Integration), 산업자동화 및 IBS, 사이버교육, 홈네트워크 솔루션, U-city 등 전 분야의 서비스 제공을 통해 연간 수천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는 효자기업으로 거듭났다. 2002년에는 (주)한화의 건설부문을 분할해 한화건설을 설립했는데 동사는 1962년에 중앙건영으로 설립되어 1971년에는 한화의 인천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1976년에는 서울 프라자호텔를 완공했다. 1988년에 덕산토건(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1996년에 (주)한화 건설부문으로 흡수 합병된 것이다. 2002년 12월에는 대한생명과 신동아화재(현 한화손해보험)를 인수했다. 신동아그룹의 모기업은 이북출신의 창업자 최성모가 1953년에 세운 조선제분(현 동아원)이다. 최성모는 조선제분을 바탕으로 계열사를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1960년대에 ‘밀가루 재벌’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69년 최 회장은 부도 직전에 몰렸던 대한생명보험을 인수했다. 대한생명보험은 1946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생명보험회사였다. 신동아그룹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당시 동양 최고층 건물인 대한생명 63빌딩(현 한화63빌딩)을 세웠다. 총공사비 1800억 원을 들여 공사에 착수한지 6년 만인 1985년 5월 완공된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빌딩이었다. 해발 265m인 남산보다 1m 낮다. 4∼19층, 23∼37층 및 40∼53층은 일반사무실용, 각종 부대시설과 전망대·수족관 등 관광공간을 마련한 점이 특징이다. 덕분에 대한생명의 자산규모는 1986년에는 1조 원을 돌파했다. 1987년에는 스위스 라이프네트워크(Life Network)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다국적기업 단체보험시장에도 진출했다. 1997년 기준 신동아그룹에는 대한생명보험, 신동아화재해상보험, 대생기업, 대생개발, 동아제분, 대생상호신용금고, 태흥산업, 에스에이인터내셔널 등의 계열사가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주력기업인 대한생명보험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되고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그룹이 해체됐다. 모기업이었던 동아제분은 1999년 한국제분에, 주력 기업이었던 대한생명과 신동아화재보험, 63빌딩은 2002년 한화그룹에 각각 인수됐다. 1946년 4월에 설립된 신동아화재해상보험은 1975년 6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1983년부터 자동차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2003년 2월 한화그룹에 편입되어 2007년 1월 한화손해보험으로 변경했고, 2009년 12월에 제일화재해상보험(주)을 흡수 합병했다.
10대 재벌 중 삼성 이어 2위의 금융왕국 세워 2003년에는 중국 북경에 한화종합화학공장을 건립하고 2004년에는 서울역사 갤러리아 콩코스를 개점했으며 한화국토개발(현 한화리조트)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경춘로 212-30에 제이드펠리스 골프클럽을 개장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가 방문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로써 한화그룹은 국내외 총 126홀을 보유해 국내 1위로 부상했다. 2006년 (주)한화는 인천공장의 생산을 중단하고 새로 충북 보은에 생산기지를 건설했으며 한국종합에너지의 한화지분을 포스코에 매각하는 한편, 한화호텔&리조트가 보광휘닉스파크의 클럽 휘닉스파크를 인수했다. 또한 한화L&C는 세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 북경과 상해에 이어 2006년 5월에 미국 알라바마에 1700만 달러를 들여 자동차부품인 언더커버, 범퍼 빔과 EPP(Expended PolyPropylene)소재의 범퍼코어 연산 37만대 규모의 부품공장을 마련했다. 주요 납품처인 현대자동차 생산기지의 북미 건설 확장에 따른 조치였다. 2007년에는 한화증권이 국내 최초로 카자흐스탄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2008년에는 중국 현지법인 한화(상하이)투자자문유한회사 설립했으며 한화L&C는 2007년에 미국 아즈델(Azdel)사의 지분을 인수했다. 2008년에는 제일화재를 계열에 편입시켜 2009년 12월 30일 한화손해보험(주)과 합병, 한화손해보험(주)으로 재출범했다. 새누리저축은행(한화저축은행)도 함께 인수했다. 한화손보는 제일화재와의 합병으로 시장점유율이 6.66%로 증가해서 삼성화재, 현대해상, 동부화재, LIG손보, 메리츠화재에 이어 6위로 부상했다. 2010년 2월에는 미국 푸르덴셜금융의 자회사인 푸르덴셜 인터내셔널 인베스트먼트와 푸르덴셜투자증권 및 푸르덴셜자산운용의 인수를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한화증권은 푸르덴셜투자증권 지분 100%와 푸르덴셜투자증권이 소유한 푸르덴셜자산운용의 지분 99.84%를 총 4900억 원에 취득, 한화투자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푸르덴셜투자증권은 1982년 6월 국민투자신탁(주)으로 설립되어 1997년 3월에 국민투자신탁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업종도 증권업으로 바꾸었다. 1997년 5월 현대그룹이 인수해서 국민투자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하는 한편, 투자신탁운용 업무를 국민투신운용에 양도하고 같은 해 9월에 한남투자신탁을 인수했다. 1998년 9월 상호를 국민투자신탁증권으로 변경한 데 이어 1999년 3월 또다시 현대투자신탁증권으로 변경했다. 2000년 7월부터 영업점 증권위탁매매 업무를 시작했으며, 2001년에 현투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2004년 미국 프루덴셜금융에 인수되어 푸르덴셜투자증권(주)으로 상호를 바꾼 것이다.
한화그룹은 생명보험, 손해보험, 투신운용, 증권 등을 아우르는 등 금융업에서 경쟁력을 갖추었다. 10대 그룹 가운데 금융업 비중만 삼성에 이어 2번째로 크다. 2010년 8월에 세계 4위의 태양광 모듈업체인 중국의 솔라펀 파워 홀딩스(Solarfun Power Holdings)의 지분 49.99%를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되면서 2011년 3월에는 한화솔라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태양광사업체로 2004년에 설립되어 태양광 관련 폴리실리콘, 잉곳/웨이퍼, 셀, 모듈, 태양광프로젝트 개발, 시공 및 프로젝트 파이낸싱(PB)사업들을 추진, 2006년에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으며 2008년에는 용왕솔라를 인수하는 등 새로운 성장동력사업으로 부상한 결과 2010년에 순이익만 5620만 달러를 기록한 세계 7대 모듈생산업체이다. 뚝심으로 미래의 신성장동력 태양광사업 추진 한화그룹이 태양광사업에 진출한데 대해 이명박 정부의 녹색에너지정책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한화케미칼은 대규모 폴리실리콘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나 전 세계적인 공급과잉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한화그룹은 2010년 4월 현재 국내 56개 계열사와 해외 66개의 법인/사무소를 거느린 자산 26조 원의 그룹으로 12위이다. 공기업을 제외하면 7위이다. 매출액은 29조 원으로 9위이며 당기순이익은 1조100억 원으로 9위이다. 김승연이 약관 29세에 부친으로부터 매출액 1조 원대의 사업을 이어받아 경영한지 30년 만에 무려 29배로 키운 것이다. 기업가 김승연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2008년에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건에 휘말렸다. 2007년 3월 8일 오전 7시쯤 서울 청담동 소재 가라오케주점에서 김승연의 차남 일행 2명이 서울 북창동 소재 모 클럽 종업원 5명과 사소한 시비 끝에 몸싸움을 벌인 것이 발단이었다. 아들 일행을 구타한 술집 종업원들을 김승연 회장이 청계산 등지에서 보복 폭행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 회장은 한동안 영어의 몸이 되는 등 수모를 겪었다. 또한 당시 이택순 경찰청장은 김 회장 측을 비호한 혐의를 받아 경찰의 신뢰에도 내상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김승연 회장은 올해 8월 16일에 업무상 배임·횡령 및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징역 4년과 벌금 51억 원의 실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복역 중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