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우리가 흔히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작업 해왔어요. 제가 수집광이라 이런 것들을 잘 버리지 못했죠. 커피를 내려 마실 때 쓰는 커피 필터도 많이 모았어요. 소재 자체가 가진 물성에 집중하고 있어요.” 인위적으로 개입해 만든 것이 아닌 물성이 가진 본래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아 보여주고 이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하는 한정림 작가를 서울 논현동 스페이스 비이(space B-E)에서 만났다. 그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경예술대학 디자인 구성조형 석사과정을 전공하고 공공미술 프로젝트 및 디자인 전시를 포함해 국내외의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그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앵무새가 종이를 찢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보인다. 영상을 먼저 본 후 작품 관람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한참동안 영상을 관람했다. 영상 속 앵무새는 직접 기르는 ‘미미’라는 이름의 새였다. 영상을 보는 동안 앵무새가 종이를 오려내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시장 벽면에는 종이를 잘라서 붙인 작업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앵무새가 잘라낸 종이로만 만든 작품이며 1년 동안 모아서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2011년 9월부터 앵무새 한 쌍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새장을 열어놨는데 앵무새가 종이를 찢기 시작하는걸 알게 됐죠. 중요한 서류도 찢고 작품도 찢고 뭐든지 말이죠. 처음에는 그 형태가 통일되지 않았는데 점차 길이나 넓이까지 일률적으로 자르더군요. 특히 암컷 앵무새 미미가 유난히 종이를 잘 잘랐고 그때부터 미미의 종이 찢는 행위에 주목하게 됐어요. 무엇보다 그 조각들이 내 작업과 유사성을 갖고 있어 그것을 모으게 됐죠. 종이를 찢는 행위는 미미가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함이고, 치장을 하기 위한 것 또한 유희적인 것이기도 해요.” 그동안 그녀의 종이작업은 분쇄기를 이용한 기계적인 작업이었다. 이번에 선보인 작업은 생명이 있는 앵무새의 행위 자체를 가시화 시키는 작업으로 이전 작업과 형태는 비슷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더 많이 담긴 다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제 작업은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집적, 반복,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완성돼요. 이번 작업은 미미를 통해 나와는 다른 생명이 갖는 다른 시간성과 마주하게 된 거죠. 이전 작업들, weaving, 바벨의 도서관에서 보인 종이자르기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분해해서 재구성하는 것과 비교해 이 작업은 그녀의 행위 그 자체를 가시화한 것이에요. 미미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 절실함을 보여줘요.”
그녀는 그동안 다양한 소재들을 모아 작업을 해왔는데 커피 필터나 커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 어릴 적 쓰던 장신구 등과 전시 도록을 모아 재구성하는 5미터에 달하는 대형 작업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 아닌 보는 사람에 의해서 다양한 시각과 의견이 나오기를 바랐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하는 그녀는 점점 물질적인 이익만을 따지며 집단주의가 강해져가면서 정체성이 획일화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점도 이야기했다. 무엇인가 다른 다양성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과 함께 작업에 있어서도 진정성이 많이 결여돼가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입체와 조각을 전공한 그녀는 앵무새의 영향으로 4년 만에 종이 작업을 선보였지만 앞으로 종이 작업은 당분간 안하겠다는 생각이다. 생명의 덧없음과 허영적인 것들을 입체화하고 설치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2013년에도 두 번의 개인전과 한 번의 그룹전이 예정돼 있는 그녀의 마지막일수도 있는 종이작업은 스페이스 비이에서 2013년 1월 10일까지 열리는 9번째 개인전 ‘MI, ME'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다. - 김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