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작가이면서 조각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매체 작업을 하는 김승영(49) 작가가 지난 10여 년 동안 수집한 낡은 스피커 186개를 바벨탑처럼 쌓아올렸다. 김승영은 그 동안 ‘소통’ 과 ‘기억’ 이라는 테마로 물, 낙엽, 이끼 등의 자연물이나 미디어를 활용한 매체작업을 통해 공간 전체를 다루어왔다. 작가에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다. 김승영은 삶은 기억의 흔적이며, 그 기억들은 타인들이나 어떤 물건 혹은 공간 등의 관계 사이에서 형성된다고 믿는다. 여러 관계들을 계속해서 구축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고 그러한 관계들은 소통을 통해서 관념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얻게 되는 상처나 좌절, 기쁨들을 작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업이 탄생한다.
1990년부터 시작한 물 시리즈는 생명의 이미지와 융합성을 담보하고 있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물은 지워지고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김승영은 "언제인가 길을 걸으며 눈에 들어온 모든 이미지들에 대한 생각을 작품에 투영시켰다"며 "스쳐 지나간 사람들 전화기에 담긴 지인들의 이름을 보면서 과거의 시간 동안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고 작업에 대해 술회했다. 작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 혹은 낡은 스피커, 의자와 같이 잊혀 가는 사물에 새로운 형태와 가치를 부여해 재탄생시킨다. 작품마다 시간의 흔적을 역 추적하고 일상의 소리를 담아내 전시장을 하나의 깊은 사유와 명상을 유도하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느린 호흡을 할 수 있는 ‘쉼’ 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자 한다. 김승영 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반복의 미학이다. 그 동안 낙엽이나 빈 책장, 자신의 얼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 등 각 작품에 존재하는 개념들은 무수히 반복되어 어떠한 집적의 형태를 이루며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작품에는 지인들의 이름,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 이끼, 벽돌, 물, 노랗거나 푸른 빛 등의 비슷한 모티프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는 기억과 소통, 즉 삶에 대한 작가의 본질적 관심사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징은 9000개의 상처 난 벽돌들이 노란 빛을 받으며 바닥 위에 한 겹으로 펼쳐져있고 곳곳에는 허물어진 건축물의 잔해처럼 벽돌이 쌓여있는 '기억을 거닐다'에도 등장한다. 가까이 다가서면 벽돌 위에 새겨진 지인들의 이름이나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보인다.
부서진 자석의 틈새나 벽돌 사이사이에는 초록의 이끼가 자라나고 있다. 숱한 관계들 속에서 부딪히고 깨진 잔해들은 서로 모여 조용한 장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자라나는 이끼는 수많은 파편들이 지닌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와의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또한 20여 개의 사진 시리즈 작품 '스트라스부르크 Strasbourg'는 작가가 스트라스부르크 거리에서 발견한 죽은 새의 흔적, 야외 광고판, 부서진 도로, 그리고 아스팔트와 시멘트 사이에서 자라나는 새싹 등의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낮은 높이에 일렬로 걸려서 스트라스부르크 거리를 걷던 작가의 시야를 따라 서성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작업의 특징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 지리멸렬한 반복의 연속이라는 감상적 체험의 결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이나 사물을 관조하고 해석하는 작가적 사고가 상당히 다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