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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_ 금호그룹 편 1화]중고택시 두 대 밑천, 정시운행으로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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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0호 박현준⁄ 2013.01.21 11:43:31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자 박인천(朴仁天, 1901~1984)은 1901년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곡리에서 빈농(貧農) 박옥용(朴玉容)의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다시면은 나주시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금성산(450m)이 솟은 동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호남의 젓줄인 영산강이 남부를 곡류하며 그 지류인 소하천 연안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영동리·복암리·가흥리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활발하며, 배를 많이 재배한다. 또한 금성산과 청림산 주변에 고인돌이 많이 분포해 있으며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진 회진토성(會津土城)을 비롯한 유물·유적이 많다. 호남선과 광주·무안 방면의 국도가 동서로 통과한다. 택시와 버스운수사업 진출, 창업의 토대 세워 박인천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세었으나 숫자계산에 매우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와 장남 성천이 맡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은 언감생심이었다. 일찍부터 생계를 위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1924년에 영광경찰서 순사로 경찰생활을 시작해서 해방 무렵까지 전라남도 각지를 전전하며 경찰관 생활을 계속했다. 퇴직 시 그의 계급은 경부였는데 경부는 경시(현 총경) 바로 밑 계급인 경감에 해당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공직에서 물러난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박인천은 지인들과 함께 약품배달업을 개시해 약간의 돈을 모은 후 택시운수업에 착수했다. 광주시의 여객운수사업이 매우 낙후되었던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박인천은 경찰시절 친분이 있던 강진의 갑부 유재의로부터 거금 10만 원(쌀 1400여 가마에 해당)을 빌려 1935년형 포드 5인승과 1933년형 내쉬 등 중고 택시 2대를 구입해서 1946년에 광주 황금동에 ‘광주택시’란 상호로 사무실을 오픈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확실한 자동차의 정비와 정시(定時)에 정차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광주의 주요 도로는 비포장 자갈길인데다 운행 중인 자동차들이 거의 대부분 중고차여서 운행 중 고장이 빈번해 승객들에게 약속시간을 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때문이었다. 확실한 정비와 정시운행으로 고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광주택시는 얼마 되지 않아 광주의 명물이 됐다.

박인천은 택시운수사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이를 계기로 버스운수사업에도 진출했다. 광주 인근의 노선별 승객 수, 자금 동원능력, 사업전망 등을 면밀히 조사한 뒤 1948년에 광주여객을 설립하고 ‘광주-장성’, ‘광주-화순’ 왕복노선을 시작으로 버스운송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노선은 광주여객이 독점한 탓에 호황을 구가해서 사업 1년만인 1949년에는 버스 보유대수가 13대로 불어났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광주여객은 더 이상 영업이 불가능했다. 광주여객 소속 버스들이 대부분 징발(徵發)되었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박인천이 차량들을 방치한 채 서둘러 피난했던 때문에 도난당하거나 파손되었던 것이다. 그는 부서진 차체와 부품들을 수거해 1950년 10월 말 목탄(木炭) 버스 2대를 조립해서 버스사업을 재개했다. 목탄가스를 연료로 하는 자동차는 1940년 일제가 태평양전쟁 수행 목적으로 민수용 휘발유배급을 전면중지하면서 국내에 처음 등장했었다. 수용인원 30여명 정도의 버스 후미(後尾)에 250kg이 넘는 숯불화통과 냉각관, 여과기 등을 부착하고 화부(火夫)가 풀무질해서 얻은 가스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이다. 냉난방시스템이 전무했음은 물론 속도가 매우 느린데다 출력까지 형편없어 언덕길을 오를 땐 승객들이 하차해서 버스를 밀어 올리느라 한여름에는 비지땀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광주여객은 전쟁특수를 누렸다. 이후 광주여객은 전라남도 전역으로 노선망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3년 휴전 무렵에는 전북지방과 멀리 부산지방까지 노선을 확대했다. 여객운수업에 있어 노선확보는 전쟁 그 자체였다. 다른 행정구역으로 노선을 확대할 경우 해당 지역의 경쟁업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진출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라도 버스가 경상도로 진출했던 탓에 광주여객이 받는 고통은 더욱 컸다. 새로 진출하는 곳마다 지역 경쟁업체들이 깡패들을 동원해서 운행을 방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경상도에 있는 전라도 출신 승객들이 더 많이 이용함으로써 광주여객은 성장할 수 있었다. 전라도민들의 애향심 덕을 본 것이다. 경쟁업체 인수합병 사세확장, 삼양타이어 설립 박인천은 버스사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1954년에는 전남지역의 최대 생사(生絲) 생산업체인 전남제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1926년 5월 25일에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교사리에서 일본인 희다우장(喜多又藏), 촌상정조(村上貞造), 그리고 호남거부 현준호(玄俊鎬) 등이 자본금 200만 원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현준호는 호남의 대지주이자 지사이기도 했던 현기봉의 차남으로 일찍이 일본에 유학해 신학문을 접한 후 귀국해서 국내의 근대기업 설립운동에 활발하게 관여했던 민족기업가였다. 전남제사는 200부(釜)의 생산시설을 확보하고 인근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누에고치를 이용해 생사(生絲)를 생산해서 일본의 방적공장들에 수출했는데 부산의 조선제사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회사였다. 종업원 수 1000여 명의 전남제사는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해 이후 전남대학이 경영했으나 부실화되어 박인천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무렵 광주여객은 경쟁업체에 대한 인수합병작업을 지속했다. 주목적은 노선확장이었다. 버스여객사업의 성패는 신규노선의 확보인데 당시 지방노선은 대부분 독점하다시피 했다. 또한 새로 노선을 신설할 때는 교통부, 내무부 등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컸으며 신설노선의 경우 사업성도 문제로 지적됐다. 가장 용이한 방법은 기존노선을 매입하는 것인데 황금노선의 경우는 프리미엄이 엄청났다. 1950년대 중반 광주여객은 지속적인 경쟁업체 인수를 통하여 사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1960년 9월에는 자본금 5000만 환의 삼양타이어를 설립했다. 1953년 2월 15일을 기해 기존 원화의 유통을 정지하는 대신 환으로 화폐단위가 바뀌었는데 당시 원과 환의 교환비율은 100대1이었다. 자동차 대수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타이어사업 전망이 매우 양호한데다 광주여객의 타이어 자체수요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무렵 국내에는 1958년 10월부터 재가동에 들어간 조선다이야(한국타이어 전신)를 비롯해 1952년 1월에 설립된 흥아(興亞)타이어와 1954년 1월에 설립된 동신화학(東信化學) 등 3사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한국타이어의 규모가 가장 컸다. 국내에서의 자동차 타이어 생산 시도는 일본의 브릿지스톤이 1939년 9월 15일에 부산에서 아사히(朝日)고무의 자회사를 설립하고 재생고무를 이용한 승용차 타이어를 생산한 것이 효시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 대수가 많지 않은 터여서 지지부진하다가 브릿지스톤사가 1941년 5월 2일에 불입자본 210만 엔의 조선다이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42년 10월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 365의 도림천변 일대에 일산(日産) 300본의 공장을 마련했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타이어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해서 한국타이어로 개명했으나 우여곡절을 거쳐 1962년에 효성그룹 소유로 전환됐다.

박인천은 광주시 양동 60번지의 전남제사 창고(건평 309평)를 개조한 후 흥아타이어 등에서 기술자를 스카웃하고 기계 40대를 설치하여 하루 20본의 생산능력을 확보해 1961년 4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그러나 삼양타이어는 소비자들로부터 ‘호박타이어’란 별명을 얻을 만큼 품질이 조악했다. 품질향상과 생산능력 확대에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돼 경제적 부담이 매우 컸다. 광주여객에서 벌어들인 수입금 전부를 삼양타이어에 투입함은 물론 고리(高利)의 악성 사채자금까지 동원했다. 삼양타이어는 지속적으로 전문기술자들을 유치하고 설비개량을 병행하는 등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65년 3월 KS마크를 획득해 첫 결실을 보았고 이와 때를 맞춰 군납업체로 지정받아 본격적인 매출신장의 기회를 잡았다. 그해 10월에는 태국에 타이어 200본을 처녀수출하는 등 삼양타이어는 정상궤도에 진입했다. 1969년에는 연산 25만본 규모로 생산능력을 확장했다. 1973년 미국 유니로얄과 기술제휴를 맺고 레디알타이어 개발기술을 제공받은 결과 1974년에는 국내 최대의 타이어메이커로 부상했다. 광주여객의 수직계열화 차원에서 설립한 삼양타이어는 여타 경쟁업체들과는 달리 무에서 유를 참조한 셈이어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고속버스사업 진출에 부도 위기…‘8.3조치’로 극적 회생 광주여객의 다각화작업은 1970년에 고속버스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967년에 최초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이듬해인 1968년에는 유사 이래의 최대 건설공사로 평가된 경부고속도로 또한 착공됐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전장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됐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변모하면서 고속버스 승객수가 격증했다. 고속버스사업이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 무렵에는 한진, 한남, 천일고속 등 선발업체들이 시장을 분할지배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였던 광주여객은 선발업자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해외 차관자금까지 끌어들여 최고급의 벤츠고속버스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어서 후발업체가 채산성을 맞추기에는 여건이 불리했던 탓이다. 삼양타이어 또한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되는 터여서 광주여객의 재무구조는 점차 열악해져 갔다. 고금리의 사채를 많이 끌어다 쓴 것이 화근이었다. 부도 직전의 광주여객은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기습적으로 발표된 ‘8.3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 15호)’ 덕분에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기업들이 끌어다 쓴 모든 사채를 거래은행에 신고하게 하는 한편, 원리금은 3년 거치 5년 균등 분할상환하며 이자율은 월 1.35%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초헌법적인 특별조치였는데 그 배경은 경제개발계획 때문이었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투자수요는 급증했으나 국내 자본이 턱없이 부족해 고금리의 사채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공금리가 시중금리보다 턱없이 낮은 터에 팽창적 통화정책 지속에 따른 인플레이션까지 가세하자 기업들의 금융비용 부담이 가중됐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업주들이 개인 돈을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에 사채로 빌려주는 도덕적 해이도 비일비재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사채자금은 주로 동내 아줌마들끼리 계를 통해 마련한 목돈이어서 ‘8.3조치’ 덕분에 상당수의 서민들만 낭패를 보았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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