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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금호그룹 편 2화

창업자 박인천 기초 닦고, 두 아들이 금호그룹 일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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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1호 박현준⁄ 2013.01.28 14:02:35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1973년 전주-순천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광주여객은 호남지역을 여행하는 고속버스 승객들을 독차지하다시피 해 회생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광주여객은 이후 국내 고속버스업계의 왕자로 부상했다. 삼양타이어 또한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증대로 자동차 공급이 확대되면서 굴지의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했다. 금호그룹 탄생을 위한 쌍두마차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광주여객이 재벌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한 때문이었다. 1973년 정부는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건설을 기치로 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철강,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요업 등에 대한 집중투자를 획책했다. 문제는 투자재원조달이었던 바, 1975년에는 1980년 수출 100억 달러를 목표로 종합무역상사제를 신설하면서 요건을 갖춘 무역상에 대해서는 재정, 금융상의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에 같은 해 삼성물산을 비롯한 대우실업, 쌍용, 국제상사, 한일합섬 등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수출 가능 사업 무차별 인수합병, 10대 재벌 우뚝 광주여객에서도 중상주의 정책에 편승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는데 1972년 10월 무역업체인 금호실업 설립이 신호탄이 됐다. 박인천의 장남 박성용(朴晟容)이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932년생인 박성용은 서울 중앙중학교을 졸업한 후 1950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55년에 미국에 유학, 1965년에 명문인 예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에 귀국해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1971년에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보기 드문 인재였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박성용은 금호그룹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당시 그의 제안으로 금호실업을 설립한 것이다.

이후부터 금호실업은 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수출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다각화사업에 착수했는데 1973년 4월에는 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을 설립하고 6월에는 곡성제사를 인수했다. 8월에는 광주고속관광을 설립하고 10월에는 삼양타이어가 전남제사를 흡수합병 했으며 12월에는 금호전자를 설립했다. 1974년 6월에는 광주투자금융을 설립하고 11월에는 광주고속이 경쟁업체인 한남고속을 흡수통합 했으며, 1975년 9월에는 금호실업이 광주은행에 지분참여하고 10월에는 삼양타이어가 방산업체로 지정됐다. 1976년 1월에는 삼양타이어가 유니로얄판매를 인수하고 3월과 8월에는 금호실업이 극동철강과 마포산업을 각각 인수해서 그해 12월에 금호실업은 국내 11번째로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다. 수출이 가능한 사업들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인 것이다. 금호화학도 같은 해 12월에 설립됐다. 금호의 기업인수는 이후에도 계속돼 금호전자는 1977년 2월과 8월에 천우사 전자공장과 동남전기 안양공장을 각각 인수해서 몸집을 불리고, 그해 6월에는 금호실업이 명천기업을 인수했으며 8월에는 제일토건을 인수해서 1978년에 금호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금호는 마구잡이로 설립 내지는 인수한 기업들을 콘체른식으로 관리했다. 금호실업이 실질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한 것이다. 그룹 출범 4년만인 1977년 계열사를 12개로 확대한 결과, 금호그룹은 국내 10위권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1980년대 들어 금호그룹은 종합상사를 자진 반납하는 등 경영여건이 크게 악화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무분별한 확장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결국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기, 전자, 철강사업을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그룹규모도 크게 축소됐다.

그 와중에서 금호그룹은 창업자들 간 지분분할 문제로 내홍(內訌)을 겪었다. 박인천이 1946년에 광주택시를 시작할 때부터 맏형 성천의 차남인 박상구(朴祥求)가 경영에 참여했다. 박인천은 자금조달 및 관청업무를 담당했으며 목포상고를 졸업한 청년 박상구는 경리 등 회사내부 살림 일체를 도맡았다. 또한 1948년에 광주여객을 설립하면서 박인천의 동생 박동복(朴東福)도 경영에 참여했다. 1906년생인 박동복은 다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부터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목포경찰서장에 부임했고 1948년 광주여객 설립 당시에는 전라남도 경찰국 소속 경찰학교장에 재직 중이었다. 광주여객이 설립되면서 박동복은 경찰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에 참여했던 것이다. 운수업은 특성상 경찰과의 연관성이 많은 탓에 경찰 고위직 출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부터 광주여객은 박인천, 박동복, 박상구 등 3인 경영체제로 운영됐는데 이들 간의 지분분할 움직임이 가시화한 것은 박인천의 2세인 성용, 정구, 삼구 등이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79년 12월 27일에는 삼양타이어 분리 건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그 후 박동복, 박상구 등이 금호그룹의 경영에서 손을 떼는 방향으로 마무리됐는데, 이때 박동복은 금호전기, 모빌코리아 등을 분리해서 독립했다. 박상구는 자신 몫으로 삼양타이어를 요구, 1980년 2월 26일 삼양타이어 주주총회에서 분리독립 건이 통과됐다. 그런데 1981년 8월 금호실업이 삼양타이어를 흡수함으로써 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후 양측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면서 항간에서는 이 사건이 국제그룹 해체 의혹과 연합철강 인수자 선정의혹과 함께 5공화국의 대표적 정경유착 비리사건으로 평가됐다. 1981년 박상구가 삼양타이어 지분을 25억 원에 넘기고 금호그룹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정부로부터 제2민항사업 따내며 아시아나항공 탄생 금호그룹에서 떨어져나간 박상구는 그의 지분을 처분해 받은 자금으로 부산, 대전, 광주 의 상호신용금고를 차례로 인수하고 경기도 안성에 도가산업을 차렸다. 그러나 사업이 신통치 못해 모두 매각하고 부산에 정착해서 부산상호신용금고의 정상화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서 일본 야마구치은행의 신용공여를 받아 부산상호신용금고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부산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는 한편, 부산 제2저축은행, 대전저축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해서 금융그룹으로의 성장이 예고됐다. 항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비호로 급성장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었다. 그러나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 박연호가 부동산 붐에 편승해 무리하게 각종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뛰어들었다가 부실화되어 2011년 2월에 영업정지되면서 파국을 맞았다. 박연호는 5조 원대의 불법대출과 회계장부 조작, 감독당국 매수 등의 혐의로 2011년 5월에 구속됐다. 한편 금호그룹은 198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도약 계기가 초래됐는데 이는 제2민항 실수요자 선정작업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말기인 1987년부터 정부가 제2민항 설립을 적극 검토하는 과정에서 재벌기업들이 제2민항권자로 선정되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했다. 제2민항사업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1988년 2월 15일 금호그룹이 제2민항 사업권자로 지정됐다. 이틀 후인 17일 서울항공(아시아나항공의 전신)을 설립하고 새롭게 항공운수사업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내의 민간항공산업은 종래 대한항공 독점체제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양사(兩社)간 복점체제로 전환했다. 금호그룹은 아시아나항공의 설립을 계기로 그간 경영상의 어려움을 만회하고 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금호그룹도 두산처럼 2대에 걸쳐 완성됐다. 창업자 박인천이 재벌로 도약하기 위한 기초를 닦은 반면, 박성용, 박정구 등 2세 경영인들이 금호그룹을 완성했는데 특히 금호그룹의 형성에 박성용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미국 예일대 출신의 경제학박사로서 대통령 비서관(1968~1970), 경제기획원장관 보좌관(1970~1971), 서강대 교수(1971~1974) 등을 역임한 경제전문가로서 당시 한국경제 개발을 주도하는 집단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또한 그가 금호그룹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무렵에 남덕우, 김만제, 이승윤 등 서강대학 경제학과 교수 출신들이 한국경제 운용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박성용의 이러한 경력은 금호그룹에 플러스알파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전문가 장남 박성용, 물류·화학 재벌로 성장시켜 창업 50주년을 맞은 1996년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전남지방의 종합금융그룹으로 발돋움했다. 전남의 광주은행과 금호종금, 금호생명, 한남투자신탁 등 이 지역 4개 금융기관 중 금호는 한남투자신탁을 제외한 3개 기관의 대주주로 부상한 것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자본금 1800억 원의 광주은행 지분을 금호건설(3.77%), 죽호학원(0.47%), 금호종금(0.89%), 금호문화재단(2.24%) 등 총 7.37%의 주식지분을 소유했다. 당시 광주은행은 광은상호금융, 광은리스, 광은창업투자, 광은파이낸스, 광은경제연구소, 광은비지니스서비스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광주은행은 전국에 143개 지점 및 출장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광주투자금융과 금호종금도 각각 3개와 265개의 점포를 보유했다. 금호는 1995년 5월에 19.92% 지분을 가진 광주투자금융의 상호를 금호종합금융으로 바꿨다. 자본금 165억 원의 금호종금은 박성용(0.79%), 박정구(0.56%), 박삼구(0.19%), 금호건설(9.61%), 금호석유화학(2.04%), 금호생명(4.72%), 죽호학원(0.1%), 금호문화재단(1.91%)이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금호는 1996년 9월에 아주생명 주식 55.1%를 확보해 금호생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아주생명은 1988년 4월에 호남생명보험이란 상호로 출발했다. 자본금 210억 원의 금호생명은 금호석유화학(38.7%)과 금호건설(16.4%)이 최대주주다. 이로써 금호그룹은 전남, 광주지역의 거의 모든 금융기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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