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군주에게 종묘는 정통성의 상징이었다. 임금은 자신의 즉위를 비롯해 세자 책봉 등 국가의 주요 대사를 종묘의 조상들에게 우선적으로 고했다. 종묘에서 정통성이 나오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던 인조가 아버지를 임금인 원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모신 것도 그 까닭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실제로 보위에 올랐던 임금의 존재를 부인한 사례도 있다. 정치역학 구도에 따른 비운의 임금이 정종이었다.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은 임금일까, 아닐까? 군주임이 분명하다. 태조 7년(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뒤 세자로 책봉됐고, 곧이어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되자 동생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이 군주임은 태조가 인정했고, 종묘에도 또한 임금임을 고했다. 태조 7년(1398년) 9월 5일 기사에는 태조는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에게 명해 종묘에 왕이 바뀌었음을 고한 내용이 있다. “제가 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덕을 계승해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병이 발생하고, 여러 사무가 많고 복잡해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려우므로, 빠뜨려진 것이 많을까 염려되나이다.
왕세자 이방과는 적장(嫡長)입니다. 그 기운은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로써 나타났으며, 또한 개국 초기에 저를 보좌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에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여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태조는 세자를 불렀다. 세자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임금 앞에 엎드렸다. 태조가 친히 교서(敎書)를 주니 세자가 받아 품속에 넣었다. 교서에는 태조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왕은 말하노라. 나라를 세워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군려(軍旅)에 오래 있음으로 서리와 이슬을 범하여, 지금에 와서는 나이 많고 병이 발생하여 정무에 집중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에 종묘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노라.” 선대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고한 것은 온 천하에 임금이 바뀌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실제로 왕위에 등극했다. 그러나 세종은 큰아버지인 정종을 애써 왕이 아닌 종친으로 생각했다. 임금임이 분명하지만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세종 1년인 1419년 9월에 정종이 승하했다. 세종은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정종을 임금이 아닌 ‘큰아버지 (伯父)’로 표현하고, 행장에도 국왕이 아닌 ‘전 권서국사(前權署國事)’ 로 적었다.
권서국사는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명나라도 시호를 전하면서 조선이 사용한 ‘조선국 전 권서국사 이모(朝鮮國 前 權署國事 李某)’라고 표현했다. 세종과 명나라는 외교문서에서 정종에게 왕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은 것이다. 정종을 임시로 나라를 맡은 권조국사로 표현 이는 형식상 사대관계인 조선과의 긴장관계를 원치 않은 명나라의 외교전략이었다.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세종은 그해 11월 29일 신하들과 정종의 능호, 묘호, 시호에 대해 의논한다. 세종과 허조는 묘호를 올리지 않을 뜻을 밝혔다. 묘호는 돌아가신 임금을 종묘의 신위에 모실 때 올리는 호다. 결국 신하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 묘호를 올리지 않는다. 세종은 정종의 아들과 딸을 임금의 자녀가 아닌 대군의 자녀로 예우하고, 정종을 백부, 자신을 효질(孝姪)이라고 호칭했다.
세종은 정종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태도를 줄기차게 보인다. 정종을 제외하고 태조와 태종의 보감만을 편찬하도록 한다. 15년(1443년)에 건립한 문소전에도 태조와 태종의 신위판 만을 봉안한다. 정종을 함께 모시자는 안은 아예 거론조차 안 된다. 특히 같은 해 5월 15일 여진 평정에 대한 하례를 받은 뒤 내린 교서에는 세종의 시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세종은 태조와 태종에 이어 자신의 여진정책을 설명하면서 태종이 ‘태조의 대통을 이어 유업을 계승했다’고 했다. 태조의 대통을 정종이 아닌 태종이 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위 계승에서 태조→태종→세종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밝힌 것이다. 정종의 묘호를 올리지 못한 것은 세종의 강한 의지를 읽은 신하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가 크다.
변계량이 세종 즉위 날에 왕위 계승 순서에 따라 태종은 정종의 아들, 세종은 손자라는 주장을 했으나 찻잔 속의 메아리에 그쳤다. 결국 정종은 조나 종이 붙은 묘호가 없이 종묘에 들어갔고, 숙종 때까지 공정대왕으로 불리게 된다. 정종의 묘호에 대한 문제는 예종 때 거론되기 시작해 성리학적 명분론이 성숙한 숙종 7년인 1681년에야 제대로 된 임금 대우를 받게 된다. 무려 300년 가까운 272년 동안 서러운 대우를 받은 군주가 정종이다. 글쓴이 이상주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대왕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http://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세종의 공부’,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