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그룹 창업자 이재준(李載濬, 1917~1995)은 경기도 시흥에서 출생했다. 그는 고향 인근의 군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18세 때부터 부친 이규응(李奎應)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정미소 일을 도우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정미소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1926~1934)에 의해 촉발된 대표적인 호황업종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이 공업화에 따른 식량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조선에서 식량생산 증가를 획책한 대표적인 식량자원 수탈정책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재준은 중일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1939년 10월에 인천 부평역 앞에 선재(線材), 석회, 철물초자(鐵物硝子), 건자재 등을 취급하는 부림상회를 창업했다. 공부보다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부평역 일대는 온통 전답(田畓)뿐인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부평이 아직 한촌(寒村)이긴 하지만 인천과 영등포 공업지대와는 서로 연결되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각종 공장들도 한창 들어서고 있어 이 지역이 경인공업지구의 핵심지역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부림상회는 처음 설립 후 한동안은 매기가 전혀 없어 고전했으나, 이듬해인 1940년부터 상황이 반전됐다. 농지를 박탈당한 농민들과 유랑민들이 생계를 위해 부평에 몰려들면서 개발붐이 조성된 것이다. 각재목(角材木) 2개 화차분(약 2만개)이 불과 며칠 만에 전부 소진되는 등 급증하는 건축자재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부림상회는 미쓰비시(三菱)중공업 계열공장을 건설하는데 소요되는 일체의 목재 독점공급권을 확보하는 한편, 부가가치 제고차원에서 목재의 직접 생산에도 착수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목재수출을 허가제로 전환하고, 1942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신의주합동제재주식회사, 조선합동목재주식회사, 미쓰이(三井)물산 등이 대주주로 참여한 조선목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전국 각지에 지점을 두고 목재의 생산에서 제재, 판매에 이르는 일체의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수많은 제재소들이 타격을 받을 형편에 놓였으나, 부림상회는 총독부로부터 전국 11개의 원목생산 및 제재업체의 한 곳으로 지정받았다. 용재(用材)생산에 대한 일제의 통제는 물자품귀와 가격폭등을 야기했다. 목재 도소매업체들이 미리 대금을 지불한 후에야 목재를 인도받을 정도로 물자부족이 극심했던 것이다. 이 무렵 이재준은 서울 신촌의 사택(社宅)과 경기도 부천에 일반주택 4동을 각각 신축하는 등 건설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잘 나가던 목재업 한계 느껴 과감히 접고 건설업 진출 부림상회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에 위치한 벌목장과 일체의 부동산이 몰수당하는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귀환 동포 및 피난민 점증으로 인한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목재수요가 다시 급증해 부림상회는 또 한 번의 도약기회를 맞이했다. 당시 전국에 배송하기 위해 서울역과 경기도 주요 철도역에 집적된 목재의 80~90% 정도가 부림상회 소유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준은 목재사업을 과감히 접고 1947년에 대림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대다수의 삼림이 북한에 편중되어 있던 터라 남한에서는 목재업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때문이었다. 장차 건설시장이 점차 커질 것이란 확신 탓도 컸다. 설립 초기에 대림산업의 경영은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당시 건설업체들이 난립한데다가 1948년에 미군정이 종식되면서 미군공사가 중단되고 6.25전쟁(1950~1953)이 발발한 탓이었다. 전쟁 중에 이재준은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집단수용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다시 건설업을 재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복구공사가 본격화하면서 대림산업은 건설특수에 따른 호황을 톡톡히 누렸다. 1960년대는 대림산업의 도약시기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한국 최초로 태국 및 베트남 등 해외건설사업에 진출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청계천복개공사 등을 통해 한때 도급순위 1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또 여수와 울산의 석유화학 및 비료공장 등을 건설하면서 산업플랜트업체로도 성장했다. 한편, 그 와중에 다각화에도 주력해서 1954년 5월에는 서울증권(주)을, 같은 해 10월에는 전일기업(현 풍림산업)을 각각 설립했다. 전일기업은 1958년 삼광건설을 흡수합병하고, 1959년에 건설업 1급 면허를 취득하면서 풍림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건설 관련 수직적 다각화로 선진국형 토건업체 성장 1955년 5월에 서울기계사업소를 설립하고, 1962년에는 콘크리트관 및 조립구조재 생산을 위해 경북 경주에 공장을 마련, 이를 기반으로 해서 1965년 12월에 대림콘크리트공업(2009년에 대림C&S로 상호 변경)을 설립했다. 1967년에는 대림PC공업을 흡수합병해서 능곡공장으로 운영했다. 1970년 4월에는 대림통상을, 1971년 4월에는 양변기·소변기·세면기·비데 및 내장 타일 제조업체인 대림요업(현 대림B&Co)을 각각 설립했다.
대림요업은 1968년 9월 20일 정부투자법인 요업센터로 설립되어 같은 해 12월에 타일 공장을, 1969년 11월에는 위생도기 공장을 각각 준공하고 생산에 착수했다가 대림산업이 인수해서 상호를 대림요업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모기업인 대림산업이 1962년 이래 지속적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에 힘입어 춘천댐 건설공사(1961.12), 영월 제2화력발전소 건설공사(1964.3), 부산화력발전소 3, 4호기 공사(1967.1), 경인고속도로 건설(1967.3), 경부고속도로 건설(1968.2),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1971.4) 등 국내의 주요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각각 참여하면서 건축자재 수요가 점증한 때문이었다. 대림산업은 당시 정부의 최대 역점사업인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건설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중화학공업 분야와 플랜트 건설사업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1974년에는 대림엔지니어링을 설립해서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의 전 공정을 커버하는 턴키베이스공사 참여기반을 마련했다. 건축 관련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설비운용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기술까지 확보함으로써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선진국형 토건업체로 거듭난 것이다. 이 무렵까지 대림산업의 사업 확장은 본업인 건설 관련의 수직적 다각화였다. 또한 대림산업은 해외건설 시장에도 적극 진출했다. 건군(建軍)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인 우리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1966년 1월에 창업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 라치기아항만 건설공사에 참여한 것이다. 1972년 8월에는 태국 시라차 라용(Siracha~Rayong) 고속도로 및 싱가포르 Marine Facilities 건설공사에 참여했으며, 1973년 6월에는 인도네시아에도 진출, Gas compression Plant를 수주했다.
1974년 1월에는 말레이시아 시부(Sibu)항만 확장공사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 진출했다. 첫 진출지인 동남아에서 중동건설 시장에까지 사업지평을 넓힌 것이다. 이후 대림산업도 중동건설 특수에 힘입어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였다. 1970년대는 대림산업의 해외건설 시장 탐색기였다. 대림산업은 중동건설 특수가 절정이던 1976년에 기업을 공개하고 쿠웨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카타르, 이집트 등 오일머니로 흥청대던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로 사업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국내에서는 1978년 5월에 주택사업자로 지정되면서 부동산붐의 진원지인 서울 강남에 대림아파트를 착공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9년 이후 포항제철 4기 설비 및 광양제철소 건설공사에도 참여했으며, 1985년에는 중부고속도로 건설공사도 수주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해외건설수출 50억 불탑’을 수상하고, 1990년에는 수주액 1조3000억여 원을 기록했다. 풍부한 자금력으로 오토바이 등 다각화에 힘써 대림산업은 이후에도 성장을 거듭해서 2010년 6조20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국내 도급순위 5위의 대형 종합건설사로 부상했다. 대림산업은 그 와중에서 국내외 유수의 대형건설공사 수주를 통해 확보한 풍부한 자금에 기초해서 다각화작업에 열중, 1978년 3월 15일에는 이륜차 메이커인 대림공업을 설립했다. 또한 1981년 기아기연공업(주)을 인수한 뒤 1982년 대림공업과 합병해서 모터사이클(이륜자동차) 메이커인 대림자동차공업(주)을 설립, 중화학 분야 및 기계공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세계 최초의 모터사이클은 독일 자동차산업의 대부인 다임러(G. Daimler)와 마이바흐(W. Maybach)가 1886년에 발명한 라이트바겐(Reitwagen)이다. 국내 최초의 모터사이클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5년에 연세대 설립자 원두우(H. G. 언더우드)의 아들인 원한경(H. H. 언더우드)이 미국에서 처음 들여온 것이다. 모터사이클 혹은 오토바이가 최초로 세상에 선보인지 30년 만에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국산 오토바이는 1962년,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이 일본 혼다와 제휴해 만든 ‘기아혼다 C100’이다. 기아자동차의 창업자인 김철호가 일본에서 귀국해 1944년에 경성전공(기아자동차의 전신)을 설립하고, 한동안 자전거(‘삼천리’호)를 만들다가 1959년 일본 오토바이 메이커인 혼다와 제휴, 경기도 시흥에서 국내 최초의 모터사이클인 ‘기아혼다 C100’을 선보인 것이다. 이후 기아자동차의 이륜차 생산전담 자회사인 기아기연은 오토바이 생산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1981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통폐합조치인 ‘2.28조치’에 따라 기아기연이 통째로 대림에 넘어갔던 것이다.
대림자동차는 1985년에 부평공장을 경남 창원공장으로 이전통합해서 생산공장을 일원화하는 한편, 1992년에 대림오토바이판매(주)를 합병했다. 창원공장(창원시 성산구 성산동 58)에 연산 30만대의 대단위 생산능력을 갖추고, 2000년 3월에 자동차부품 전문제조업체인 성림기계(주)를 합병했다. 2004년 9월 혼다와 결별하고 독자모델 개발에 노력한 결과, 2011년 현재 배기량 50cc 스쿠터에서 250cc 모터사이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중남미·유럽·중국·동남아 등지로 수출은 물론, 국내 이륜차시장의 약 70%를 점유하고 있다. 1977년 6월에는 대림학원을 설립하고 경기도 안양에 2년제의 대림공업전문대학(1998년 대림대학으로 개명)과 안양여중고를 각각 설립했다. 국내의 여느 성공한 기업가들처럼 창업자 이재준도 육영사업에 손댄 것이다. 대표적 자원빈국인 한국의 경우 인적자원 개발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었던 때문이었다. 1987년에 호남에틸렌을 인수해 대림산업 석유화학사업부로 편성했다. 호남에틸렌은 1973년에 설립된 국영기업인 한국종합화학공업이 1976년 11월 여천석유화학단지 내에 제1 나프타 분해공장을 기공하며 자회사로 설립한 것이다. 제1 나프타 분해공장은 1979년부터 가동됐다. 육영사업 통해 인적자원 개발에 나서기도 1989년에 제2 나프타 분해공장 및 HDPE공장을 가동하고, 1992년 충남 조치원에 플라스틱 가공공장을 신설 확장했으며, 1994년에는 석유화학제품 판매전담 목적으로 대림코퍼레이션을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에 세계 최초로 L-LDPE 상업화 및 PP공장(용성공장)을 가동하고, 1996년엔 BOPP공장(전주공장)을 가동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는 사업구조 조정작업의 일환으로 9월에 대림엔지니어링을 흡수합병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림산업과 한화석유화학이 NCC부문을 통합해 여천NCC(주)를 설립했다. NCC는 나프타 크래킹 센터(Naphtha Cracking Center)의 머리글자로 나프타를 열분해 해서 석유화학산업 기초 원료를 생산하는 사업을 일컫는다. 생산품목 및 연간 생산능력은 에틸렌 181만 톤, 프로필렌 91만 톤, 비티엑스(BTX) 79만 톤, 뷰타다이엔 22만 톤, 기타 127만 톤 등이다. 한편, 대림산업 석유화학사업부는 2004년에 2억30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석유플랜트 공사를 수주했고, 200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0억 달러 규모의 폴리카보네이트 플랜트 공사를 수주했다. 국내시장 점유율은 2006년 기준으로 에틸렌 28.4%, 프로필렌 21.3%, 뷰타다이엔 23.1%이다. 자본금은 1000억 원, 매출액은 3조5000억 원이다. 전남 여수시에 에틸렌공장, 방향족(BTX)공장, 뷰타다이엔공장, MTBE공장, SM공장, C4공장, 아이소뷰테인공장 등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2000년에는 폴리프로필렌(PP)부문을 분리, 네덜란드 몬텔과 합작해서 폴리미래를, 그리고 Phillips사와 합작해서 KRCC를 각각 설립했다. 폴리미래는 합성수지 및 플라스틱 물질 제조업체로 여수시 화치동, 중흥동, 평여동에 생산공장을 거느리고 있다. 대림산업 석유화학사업부는 2007년 말 기준으로 여수시에 고밀도폴리에틸렌(HDPE) 공장, LHDPE 공장, PB 공장, COMPOUND 공장 등 4개 공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출액은 2006년 2/4분기 현재 3164억 원에 이르렀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