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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⑦ 종묘의 반성문]양녕대군, ‘14년 세자’ 박탈당하다

태종의 장남, 변계량 구명운동에도 끝내 폐세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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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3호 박현준⁄ 2013.04.22 11:09:00

조선 역사의 그늘에서 숨 쉰 왕자가 양녕대군이다. 태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자 자리에 14년간 있었던 양녕대군은 성군 세종대왕의 형이다. 신흥 강국 조선의 임금이 돼야 했으나 폐세자의 비운을 맛본 양녕대군의 슬픔은 종묘에도 배여 있다. 무인 기질이 있던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의 뜻과는 달리 공부를 등한시 하는 가운데 구설수에 올랐다. 여러 차례 경고와 달래기를 하던 태종은 17년(1417년) 2월 17일 세자인 양녕대군을 장인인 김한로의 집에 두게 하고 생필품 공급을 중지시켰다. 이에 세자의 빈객인 변계량과 탁신이 김한로의 집과 궁궐을 오가며 세자 구명 운동에 나선다. 변계량과 탁신은 거듭 세자가 깊이 뉘우친다고 태종에게 보고를 했고, 태종은 아들을 용서해주려는 비책을 지시한다. 변계량 등에게 “경 등이 세자의 실수를 극진히 아뢰어 세자로 하여금 뉘우쳐 깨닫게 하고, 세자가 다시는 전일의 행동을 밟지 않도록 종묘(宗廟)에 맹세하는 글을 올리게 하라”고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조상을 모신 종묘에 고한 뒤에는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만약 성심(誠心)으로 허물을 고쳐 종묘에 고한다면 내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미 종묘에 고하고서 또 전일과 같다면 그것은 실로 조종의 영령을 속이는 것이니, 내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며 아들을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양녕대군은 마침내 변계량의 지도를 받아 작성한 반성문을 종묘의 영령들에게 올렸다.

종묘의 영령들에 올린 절절한 반성문 “증손(曾孫) 왕세자 신(臣) 이제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대왕의 영전에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공을 쌓고 어짊을 베푸시고, 태조께서 대업을 개창하고 왕통을 드리웠습니다. 우리 부왕(父王)께서는 이를 잘 계승하시었습니다. 저를 적장(嫡長)이라 하여 세자로 책봉하시고 아침저녁으로 지극히 깊은 공부와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군부(君父)의 마음을 우러러 몸 받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뜨려, 여러 번이나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여 그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위로는 조종(祖宗)의 덕을 더럽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이 비록 우매하다 하더라도 양심(良心)의 발로는 그만 둘래야 그만두지 못함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글을 읽어 의리(義理)를 대략이나마 아니, 감히 마음을 씻고 행실을 고쳐 그 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조목을 갖추어 조종의 영전에 다짐하는 바입니다.

첫째, 부왕(父王)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감히 어기지 아니하고, 잠시라도 감히 소홀히 아니하여 항상 마음에 두어, 그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 둘째, 조상의 힘들고 어려웠던 점들을 우러러 생각하여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 신(神)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겠습니다. 셋째, 형제부터 구족(九族)에 이르기까지 친하고 사랑하여 그 좋고 싫음을 같이하되, 끝까지 변함없이 함으로써 조종께서 일시(一視)하시는 뜻을 온전하게 하겠습니다. 넷째, 간사한 무리를 멀리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깝게 함으로써 밖에서 꾀어내는 사특함을 버리고 본연(本然)의 선(善)을 확충하겠습니다. 다섯째, 낮에는 책읽기를, 밤에는 생각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여섯째, 참소와 사특함을 끊어 버리고 직언(直言) 듣기를 즐기되 끝까지 바꾸지 아니하겠습니다. 일곱째, 금색(禽色)의 황망함과 술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는 것은 옛 문헌에도 실려 있으니, 만세(萬世)에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언행이 일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본 태종은 다음 날 세자에게 대궐로 돌아올 것을 명한다. 이에 대소신료들이 “세자께서 허물을 뉘우쳤으니 더없이 기뻐 하례 드린다”고 이구동성이었고. 임금도 “과인이 세자를 보지 않으려고 했더니, 이제 허물을 뉘우치니 매우 기쁘다”고 답했다. 세자는 종묘의 조상과 부왕인 태종에게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문을 올린 뒤 용서를 받은 것이다.

부친의 마음이 동생(세종)에 있음을 간파 그러나 세자는 용서를 받은 뒤에도 생활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세자가 이후에도 문제를 일으키자 태종은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이를 안 신하들은 6월2일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6월 6일 태종은 세자를 폐세자 결심을 굳혔다. 폐위된 세자는 양녕대군으로 강등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됐다. 11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된 지 14년만의 일이다. 황희 등 조정의 원로대신들 중 일부가 반대했지만 오히려 이들은 태종에 의해 유배를 당했다. 태종과 뜻이 맞지 않았던 양녕대군은 폐세자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살기 위한 처세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충녕대군에게 가 있음도 읽었다. ‘연려실기술’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효령대군 보(補)는 일찍이 부처를 좋아하였는데, 양녕이 미친체 하고 방황하니 효령대군이 그가 폐위될 것을 짐작하고 글공부에 전념하자 양녕이 지나다가 발로 차면서 “어리석도다 네가 충녕이 제왕의 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은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에 들어갔다.’ - 이상주 역사작가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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