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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동국제강그룹 편 2화

철강 외길, 국내최초 철강전문기업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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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7호 박현준⁄ 2013.05.20 14:00:45

1973년 7월에는 중앙투자금융을 설립해서 금융업에 진출했다. 동국제강의 금융업 진출은 장경호가 1950년대 중반 서울은행의 대주주가 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재벌에 귀속되었던 시중은행들의 주식이 일괄적으로 정부에 귀속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동국제강은 1973년 9월에 40톤급 전기로 2기(4, 5호) 및 국내 최초로 빌릿 연속주조기를 각각 설치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강원도 삼척 소재의 국내 최초의 고로제철소인 삼화제철(三和製鐵)까지 인수했다. 삼화제철은 일제 말엽인 1942년 12월 23일에 확정한 일본 정부의 ‘소형용광로 건설방침’에서 비롯됐다. 제2차 세계대전 전황(戰況)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군수용인 철, 알미늄, 석탄, 선박, 비행기 등의 긴급 증산을 목적으로, 일제는 국내외 곳곳에 제철소 건설을 서둘렀던 것이다. 중국 화북 18만 톤, 화중 4만 톤, 몽골 7만 톤, 한국 16만 톤, 북해도 3만 톤, 대만 2만 톤 등 총 50만 톤 규모의 소형용광로를 신설하는 계획이었다. 끊임없는 수직다각화로 철강전문기업집단 완성 일본제철은 겸이포(20톤급 10기)와 청진(20톤급 10기)에 제철소를 건설했다. 조선제철은 평양에 20톤급 10기를, 이원(利原)철산은 이원에 20톤급 5기를 각각 건설했다. 일본무연탄제철은 해주(20톤급 2기)와 진남포(20톤급 8기)에, 일본강관은 원산에 20톤급 10기, 종연실업은 평양에 20톤급 10기, 시천제철(是川製鐵)은 삼척에 20톤급 10기를 각각 건설하기로 계획했다. 무연탄을 연료로 하는 소형용광로는 고로에 비해 원가가 높을 뿐만 아니라, 생산능률 또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을 강행한 것이다.

일본증권가에서 ‘최후의 큰손’ 혹은 ‘칠전팔기의 사업가’로 명성이 높았던 시천은장(是川銀藏)은 1943년에 시천제철을 설립하고, 강원도 양양 등에서 생산한 철광석을 이용할 목적으로 강원도 북평에 20톤급 소형 용광로 8기를 설치했으나, 해방 무렵에야 겨우 완공한 상태였다. 시천제철은 해방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정부에 귀속, 삼화제철공사(三和製鐵公社)로 상호를 변경하고 1952년에 4357만 환의 국고보조금으로 시설확대 및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완료, 1954년 6월에 시험생산 했다. 그러나 원료확보 곤란, 채산성 악화 등으로 휴업했다가, 1957년에 산업부흥 국채기금 2억4800만 환을 투입해 시설 근대화작업을 완료하고 1958년에 민간에 불하됐다. 당시 남한에는 대한중공업의 인천공장(인천제철)과 삼화제철이 유일한 제철소였다. 삼화제철은 민간에 이양된 이듬해인 1959년부터 가동을 재개했으나, 경제성 문제로 장기간 휴지상태에 있었다. 동국제강은 삼화제철의 고로를 개수해서 소결원료인 생석회공장으로 활용했다. 동국제강은 설립 이래 생산시설의 확대 및 제선, 제강, 압연, 수송 등으로 끊임없이 수직다각화를 통해 국내 최초의 철강전문기업집단을 완성했다. 고정비용이 높은데다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되는 철강사업을 계속기업화 했다. 더구나 당시까지 국내 제철소들은 기술력은 물론 가격경쟁력까지 외국산에 비해 크게 낮았던 점까지 감안했을 때, 급성장한 계기가 특히 주목되는데 1966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때문이었다. 동국제강이 베트남에 철강재를 수출한 것은 1963년부터였으나, 수출이 본격화한 것은 1966년 이후부터였다. 동국제강은 월남에 철강재를 수출해 축적한 자금으로 다각화했던 것이다. 동국제강 또한 한진이나 현대그룹처럼 베트남특수를 계기로 재벌화에 성공했다. 1960~1970년대는 동국제강그룹의 고도 성장기였다.

1975년 9월 창업주 장경호가 사망하면서 장상태 경영체제로 전환됐다. 1976년 5월에는 부산가스의 풍국알곤가스를 인수하고, 같은 해 6월에는 인천공장에 전기로 30톤 2기를 설치 완료했다. 1978년 12월에는 신중앙상호신용금고 외 2개사를 인수해서 금융부문을 강화했으며, 1979년에는 중공업 진출을 목적으로 1961년에 설립한 특수강, 주물단조 및 기계장치업체인 부산제철소를 동국중기공업으로 재발족 시켰다. 국제그룹 산하 3개 계열사 인수로 외형 확대 1985년 2월에는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 국제통운 등 국제그룹(창업자 양정모)의 주력 계열사 3곳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재계랭킹 7위의 국제그룹이 1985년 2월 21일에 전격적으로 해체된데 따른 결과였다. 20여개에 이르던 국제그룹 계열사들 중 모기업인 국제상사 등 5개사는 한일합섬그룹으로, 2개 계열사는 우성건설에, 극동, 동방, 아세아시멘트, 동양고무 등은 각 1개 업체를 인수받았으며, 동국제강은 한꺼번에 3개사를 넘겨받은 것이다. 권철현(權哲鉉)은 1962년 12월 10일 부산에서 ‘냉간압연’이란 새로운 공법(工法)의 연합철강공업(주)를 설립했다. 당시 ‘열간압연’의 한국철강이 독점하고 있던 국내 철강시장에 신규로 진출하면서 차별성을 강조한 것이다. 고온(高溫)상태에서 철판을 뽑아내는 열간압연에 비해 냉간압연은 가열하지 않고도 상온(常溫)에서 압연하여 철판을 만드는 기술로 철판 두께가 일정하고 강도도 높아 선진국에서는 이미 종래 ‘열간압연’에서 ‘냉간압연’으로 전환하는 추세였다.

한국철강이 공급과잉을 구실로 맹렬히 반대했음에도 연합철강은 공장건설을 강행해 1967년 9월에 국내 최초로 부산에 연간 10만 톤 생산 규모의 냉연강판 공장을 준공했다. 이후 승승장구해서 1971년에는 연산 100만 톤급 규모의 국내 최대 철강기업으로 성장, 은행과 정부투자기관을 포함한 국내기업 매출순위 21위를 기록했다. 1973년 6월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고 1974년에는 국내 철강업 역사상 최초로 수출 실적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철현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1975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977년에 계열사인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통운 등과 함께 국제그룹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동국제강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연합철강은 1986년 2월에 국내 최초로 갈바륨강판을 생산하고, 같은 해 3월에는 연산 20만 톤의 전기아연도금강판 공장을 준공했으며, 1987년 8월에는 냉연제품 생산 1000만 톤을 달성하는 등 단기간에 주력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1-1의 국제종합기계는 1968년에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관리기, 경운기 등의 농기계 및 디젤엔진, 발전기 등의 산업용 장비 생산을 목적으로 한 유신기계로 설립되었으나, 1977년 9월에 국제그룹이 인수해서 1978년에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동국제강은 연합철강 등을 한꺼번에 인수함으로써 14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리는 국내 최초의 철강전문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동국제강그룹, 창업 2대에 걸쳐 완성 1987년 부산제강소는 국내 최초로 전제품 JIS(일본공업규격)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2월에는 철강업계 단위공장 최초로 100만 톤 출하를 달성하기도 했다. 또한 동국제강은 1988년 2월에 포스코와 합작해서 아연도금강판, 알루미늄아연합금도금강판, 알루미늄도금강판, 컬러강판 등 표면처리 강판의 생산 및 판매를 목적으로 포스코강판(주)를 설립하고 같은 해 3월 기업을 공개했다. M&A 등을 통한 지속적인 확장과 제품 다변화로 동국제강그룹은 1988년 10월에 그룹 매출 기준으로 재계 10위에 진입했다. 1990년 11월에는 연합철강이 ‘2억불 수출탑’을 수상했으며, 1991년 6월에는 동국제강이 경북 포항에 연산 70만 톤의 포항1 후판(厚板)공장을 준공했다. 그룹의 생산거점이 종래 부산과 인천에서 국내 최대의 제철단지인 포항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 결과 1994년 12월에 동국제강은 매출액 1조 원을 돌파했다. 또한 동국제강그룹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창업자 장경호의 유지를 받들어 1990년에는 재정적 지원을 통해 불교방송국 개국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6년 3월에는 출연재산 100억 원의 송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97년 4월에는 연합철강이 중국에 진출해서 무석장강박판유한공사를 설립했다. 1999년 2월에는 동국제강이 포항에 연산 40만 톤의 봉강공장을 준공하면서 부산제강소의 공장을 폐쇄, 창업 터전인 용호동시대를 마감했다. 같은 해 5월에 국제통운은 부산항 제4부두운영(주)에 참여했으며, 동국제강은 같은 해 8월 부산 신평동의 영성제강을 인수, 12월에는 ‘4억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창업자 장경호 사후부터 1990년대까지 동국제강그룹은 외형 확대와 질적 고도화를 병행했던 심화발전기였던 것이다. 동국제강그룹은 두산이나 금호, 대림그룹과 마찬가지로 창업 2대에 걸쳐 완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국제강그룹의 사업내용은 역시 비슷한 역사를 지닌 여타 재벌들에 비해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오로지 철강 외길을 고수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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