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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⑬ 국왕의 메아리]“종(宗)보다 조(祖)로 불러주오”

사후 신조를 종묘에 봉안할 때 신실에 명칭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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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9호 박현준⁄ 2013.06.03 11:50:36

묘호에서 조와 종의 차이는 무엇인가. 묘호는 임금의 사후 신주를 종묘에 봉안할 때 신실에 붙이는 명칭이다. 즉 태조, 태종, 세종 등의 호칭이다. 조선은 27임금 중 7군주가 묘호에서 조를 받았다. 조(祖)와 종(宗)을 쓰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창업지군칭조(創業之君稱祖) 계체지군칭종(繼體之君稱宗)이다. 나라를 연 임금에 대해 조라 호칭하고, 부자간에 왕통을 계승한 군주는 종으로 부른다. 둘째,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이다. 공이 높으면 조이고, 덕이 많으면 종이라고 한다. 셋째, 입승왈조(入承曰祖) 계승왈종(繼承曰宗)이다. 왕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면 조이고, 계승하면 즉 왕자가 임금이 되면 종이다. 조선에서는 위의 세 가지가 혼용됐다. 그 중 확실하게 지켜진 것은 ‘창업지군칭조’이다. 나라를 연 임금을 태조로 한 것이다. 이후의 임금은 ‘유공왈조 유덕왈종’을 기본으로 하되 ‘입승왈조 계승왈종’의 논리가 가미됐다. 중국은 나라마다 원칙이 달랐다. 묘호제도가 처음 시행된 한(漢)나라는 전한의 태조와 후한의 세조만 창업군주로서 ‘조’를 받았다. 당나라는 ‘창업지군칭조 계승지군칭종’을 적용해 고조만 ‘조’를 받고 나머지 임금은 ‘종’을 받았다. 송나라도 창업자인 태조 외에는 모두 종이다. 원나라는 창업주인 칭기즈칸이 태조를,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세조의 칭호를 받았다. 두 명이 ‘조’를 사용했다. 몽골의 창업주는 칭기즈칸이고, 대원제국의 창업자는 쿠빌라이이기에 ‘창업지군칭조 계승지군칭종’의 기준을 따른 셈이다. 명나라는 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태조, 영락제가 성조라는 이름을 썼다. 두 명이 ‘조’를 사용했다. 성조는 애초 태종이었으나 사후 115년에 바뀌었다. ‘창업지군칭조 계체지군칭종’에다 ‘유공왈조 유덕왈종’을 더한 것이다. 청나라는 조가 세 명, 종이 아홉 명이다. 유공왈조 개념이 많이 반영된 탓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중국의 한족 국가인 당나라와 송나라는 창업군주에게만 ‘조’를 사용했다. 비록 명나라에서 두 명이 ‘조’를 썼지만 원칙을 지키려고 한 셈이다. 이에 비해 북방민족인 청나라는 건국과정이 길었기에 창업주 외에 실질적으로 국가를 여는 데 공이 있는 임금에게 유연하게 ‘조’를 사용했다. 조선도 ‘조’에 유연한 입장이었다. 이는 ‘조’를 더 받기 원했다는 의미다. 태조 외에 여섯 군주가 조를 받은 것은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종’보다는 ‘조’를 선호한 결과다. 세조의 묘호는 아들 예종의 의지가 반영됐다. 신료들이 올린 안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이 셋 중에 임금이 하나를 낙점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예종은 “대행대왕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볼 때 세조(世祖)로 일컬을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정인지가 “세조는 우리 조종(祖宗)에 세종(世宗)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예종이 “한나라에도 세조와 세종이 있었다. 이로 볼 때 세조를 올리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했고, 신하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면서 임금의 뜻을 받들었다. 예종은 제2의 건국을 한 세조를 ‘창업지군칭조’ 또는 ‘유공왈조’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소종으로서 대종이 된 세조가 후세의 논란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한 것이고, 계유정난을 제2의 건국으로 정당화해 왕통(王統)을 바꾸는 상징적 의미가 담겼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희박해지 창업지군칭조, 계승지군칭종 인종은 아버지인 중종을 ‘조’로 부르자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선조는 원래 선종이었다. 그러나 사후 8년에 허균, 이이첨 등의 건의를 광해군이 받아들여 선조로 했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수호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속내는 후궁의 왕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려는 목적이 깔려 있었다. 이번에는 인조의 묘호 문제를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조와 종의 위계가 엿보인다. 조가 종보다는 앞선다는 행간을 읽을 수 있다. 효종 즉위년(1649년) 5월 15일에 좌의정 이경석 등이 인조의 묘호를 의논하여 열조(烈祖)로 올렸다. 그런데 열조가 중국 남당(南唐)시대에 사용한 묘호임을 알고 5월 23일 다시 논의하여 인조로 고쳤다. 이날의 효종실록을 보자. 응교 심대부, 부수찬 유계, 사간 조빈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유인즉슨 선조를 조로 부른 것도 이미 의롭지 아니한 것이니 계승하는 임금은 백세에 빛나는 공덕이 있더라도 종이라 하지, 조라 하지 아니합니다. 종이 조보다 못한 것은 아니지만 조를 종 위에 두어 조종(祖宗)이라 하는 것입니다. 선왕에게 조의 호칭을 올리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고 예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당시 신료들은 계승하는 임금은 백세에 빛나는 공덕이 있더라도 조로 할 수 없고, 조가 종보다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조는 원래 영종이었다. 그런데 승하한 지 113년이 지난 고종 26년(1889년) 12월 5일에 영조로 묘호가 바뀐다. 이에 앞서 김홍집, 김병시, 조병세 등 대신들은 임금의 공로가 크기에 영종이 아닌 영조가 타당하다는 의견을 낸다. 이에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고(英考)의 50년 동안 정치가 융성하였고 덕은 모든 임금 중에 으뜸이다. 문장과 계책과 무공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므로 백대 후에도 탄식하며, 오래될수록 잊지 못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지금 경들의 의논을 들어보니, 묘호를 추후에 높이는 것이 여러 사람의 여론에도 참으로 부합하여 나 소자는 감동되어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공이 있으면 조로 칭하는 것은 바로 변할 수 없는 법이니, 오늘 추후에 천양하는 것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이로 볼 때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유공왈조’가 묘호의 기준이 됨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지켜진 ‘창업지군칭조 계승지군칭종’의 개념이 희박해진 것이다. 따라서 은연중에 조가 종보다 격이 높다는 인식이 있었음도 드러난다. 정종이었던 정조, 순종이었던 순조도 이 같은 흐름 때문에 바뀌었다. -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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