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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⑭]할아버지 영조의 리더십, 애민으로 손자를 감싸다

영조에게 왕위 계승한 정조, 세실 교문 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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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0-331호 박현준⁄ 2013.06.17 11:43:37

종묘에 모셔진 신주는 사대(四代)가 되면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긴다. 그러나 특히 공덕이 많은 왕은 영원히 옮기지 않는다. 태조, 태종, 세종 같은 임금이다. 그런데 사대가 되기도 전에 영원히 모시는 불천지위로 선언된 임금이 있다. 효종과 영조 등이다. 영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6년(1782년) 11월 27일 영조대왕을 세실로 정하는 데 대한 교문(敎文)을 반포했다. 영조와 정조는 여느 할아버지-손자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다. 영조는 정쟁과 판단착오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다. 종통을 따지고 음모가 판치는 정계의 현실로 볼 때 사도세자의 죽음은 세손에게도 생명의 위험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영조는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찍 죽은 큰아들인 효장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했다. 즉,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선언, 세손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불행한 영조는 아버지 없는 손자를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핀다. 영조는 일흔한 살 때에 열두 살인 손자에게 열 가지 훈계를 하는 어제조훈(御製祖訓)을 지었다. 임금은 어제조훈의 취지를 이렇게 말했다. 4백 년 이어온 조선의 왕업이 오늘에 이르러 팔순(당시 임금은 일흔한 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당시 열두 살)만 있어 위태롭구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의지해야 하는 위기가 과연 역사에서 있었겠는가. 나는 얕은 지식을 한탄하며 너에게 다섯 가지 권함과 다섯 가지 경계함을, 할아버지가 남기는 교훈이라는 뜻의 조훈(祖訓)으로 이름하여 적는다. 임금은 열 가지 수칙을 적은 뒤 말미에 다시 당부했다. “이 훈계는 나의 마음을 다해 적은 것이다. 판단하고 가리고 익히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너는 성심을 다해 훈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이 훈계를 체득해라. 할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글을 지었다. 이 글들을 귀한 거울로 생각하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무한 사랑을 알고 있었다. 네 살 때부터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며 유능한 군주로 키우기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 정조는 그를 불천지위로 정한다. 정조가 조천논의가 되는 4대가 지나지 않은 상태, 승하 후 불과 7년 만에 세실로 정한 파격적인 이유를 교문으로써 신하들에게 설명했다. 승정원일기에 이 교문이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에 실린 교문 영조를 세실로 정해야 하는 이유를 효도, 학문, 하늘공경, 애민, 외교의리, 예절, 형벌, 검약, 국방, 풍속 등 열 가지 업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효도다. “효도는 천성으로 타고나셨고, 우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셨다. 숙종을 섬기시면서 종신토록 사모하였고, 경종에게는 대통(大通)을 계승한 의리를 다하셨다.” 둘째, 학문이다.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표준을 세우고 스스로를 닦아 남을 다스리는 것이 공자처럼 집대성의 경지에 도달하셨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자의 소학을 부지런히 읽으셨다. 구순(九旬)의 연령에도 하루 세 번의 경연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셋째, 하늘공경이다. “자연현상에 따른 백성 걱정으로 비단옷을 입거나 쌀밥을 드실 겨를이 없으셨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셨고, 오래 묵은 종이나 닳아빠진 먹(墨)도 오히려 소홀히 할까 경계하셨다. 성의 깊은 기도로써 하늘을 감격하게 하셨다.”

넷째, 애민이다. “조세를 감면하고, 창고를 자주 열어 빈민을 구제하셨다. 특별히 비공(婢貢)을 면제해주자 시집갈 때에 즐거워하였고,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良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자 천한 사람들이 천한 신분을 탈피할 수 있었다. 하천을 준설하시고, 힘 있는 사람이 백성의 토지를 빼앗는 것을 금지하셨다.” 다섯째, 외교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낸 명나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세 개의 제단을 증축하여 표현하셨다. 또 절의를 세운 사람의 사당에 제사를 하사하고 충량(忠良)한 사람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셨다.” 여섯째, 예절이다. “오례(五禮)를 수정하고, 육전(六典)을 밝히셨다. 성균관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가셨다. 벼와 보리 베는 것을 살펴보고 누에고치를 받는 등 모든 일을 다 거행하시어 작은 절목(節目)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일곱째, 형벌이다. “죄인을 신중히 심리하시어 옥사를 결단하실 때에는 불쌍히 여기고 공정히 하셨다. 혹독한 형벌을 없애셨다. 장형(杖刑)을 태형(笞刑)으로 바꾸고, 처자를 노비로 삼지 않도록 하셨다. 신문고를 설치하여 억울한 하소연이 통할 수 있도록 하셨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심리하도록 하셨다.” 여덟째, 검소함이다. “검소함을 몸소 실천하셨다. 의복은 삼순(三旬)이 되어도 바꾸지 않았으며, 궁궐은 서까래 하나도 더 얹지 않으셨다.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지하셨다. 머리에 너무 치장하는 것을 바로잡으셨다.” 아홉째, 국방이다. “속병장도설을 새로 만들고 군병(軍兵)을 사열하셨으며, 용기(龍旗)와 조장(鳥章)을 만드니 그 위엄이 빛났다. 그리고 이것을 미루어서 방어의 요새지에 멀리 바라보며 공격하고 수비할 수 있는 누대(樓臺)를 증축하고 수리하셨다. 또 힘이 있는 병사를 항상 부지런히 권장하고 발탁하셨다.” 열째, 풍속이다. “당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은혜를 베푸셨다. 항상 적체를 해소하는 정사를 시행하였으며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이 나오도록 할 수 있는 규식을 힘을 다하여 강구하셨다. 그리하여 만물이 모두 원하던 바를 이룰 수가 있었으며 태평의 화기를 풍기게 되었다.” 할아버지 영조의 열 가지 업적을 말한 정조는 다시 배경 설명을 덧붙인다. 영조의 리더십과 애민정신으로 나라가 태평성대가 되고, 예악이 찬란히 빛났다는 것이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공적은 단순히 임금인 정조의 생각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생각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영조를 불천지위로 영원히 받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조의 생각을 읽어보자. 아, 감동하는 것은 사사로운 혜택이 있어서가 아니고, 사모하는 것은 사사로운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다. 대소의 관원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이의가 없도다. 이것이야말로 떳떳한 본성을 지니고 덕을 좋아하는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비록 성인(聖人)에게 물어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옛 제도를 거행하여 세실로 올려 빛나게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에 서운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어떻게 팔도의 신민(臣民)이 선왕을 못 잊어하는 뜻을 크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 이상주 역사작가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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