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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34]김포 장릉 ~ 고산사 길

천등고개는 정조의 민심탐방 현장, 강화도령은 여기서 왕위계승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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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5호 박현준⁄ 2013.07.15 13:37:34

1797년 추석날 아침 정조(正祖)는 조상님전(璿源殿)에 차례(茶禮)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 김포 장릉(章陵)의 능행(陵幸)을 거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 현륭원(顯隆圓)에 참배가는(圓幸) 코스를 잡은 것이다. 남대문(崇禮門)을 나서 남묘(南廟: 관운장을 모신 사당, 대우빌딩 뒤 도동에 자리잡고 있다가 동작동 국립현충원 옆으로 이전)에 들려 예를 올린 후 강화대로를 따라 양천현(陽川縣: 가양동 궁산 앞)에 들렸다. 여기서 휴식을 취한 후, 말을 타고 굴포교를 건너 현재 고촌면에 속한 천등현(天登峴)을 넘어 장릉(章陵)에 이르렀다. 필자는 버스를 타고 이 길을 간다. 그 예전 검포(黔浦)에서 신라 경덕왕 때 김포(金浦)가 된 김포시는 이제는 인구 30만을 바라 보는 큰 도시가 되어 이 길로 다니는 버스편도 한둘이 아니다. 도회지가 된 고촌을 지나자 버스에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음 내리실 곳은 천등고개, 천등고개입니다.’ 정조, 거둥(行幸)마다 민초 불러 고초 물어 정조는 거둥(行幸)할 때마다 지나는 길 민초들을 불러 고초를 묻곤 했다. 이날도 주변마을 연세든 이들을 불러 애로사항을 물어 고초를 덜어줬다(至天登峴, 召見本縣父老詢瘼). 천등고개는 그런 고개였다.

천등고개를 지나면 또 하나 기억나는 인물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哲宗)이다. 흔히들 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무지랭이를 안동 김씨가 이용하기 위해 임금자리에 앉혔고 할 일 하나 없이 여색에 빠져 살다 간 무뇌인간(無腦人間)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조선은 정조 이후에 자식이 매우 귀했다.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는 일찍 죽었는데 다행히 수빈 박씨에게서 아들을 얻어 왕위(순조)를 이었고, 순조도 외아들 효명세자를 잃었는데 손주(현종)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종은 무자(無子)였다. 어떻게 왕위를 이어야 할까? 그나마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세자의 작은 부인 중 숙빈 임씨 소생 은언군의 핏줄이 살아남아 있었다. 은언군은 정조의 배다른 아우이니 은언군의 직계인 철종에게 정조는 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가까운 종친이 없던 당시로서 철종은 왕위를 계승할 만한 위치에 있었기에 대왕대비가 된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가 영(令)을 내렸던 것이다. 얼떨결에 대명(大命)을 받고 길을 떠난 이원범(哲宗)은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호떡 하나도 사양하고 받는 법인데 나라님 자리를 대왕대비의 영(令)이라고 덜렁 길을 나섰으니 천등고개에서 이 영(令)을 받을 수 없다고 버티었다. 어떤 이들은 강화도령이 천등고개에서 집으로 가고 싶어 울부짖으며 떼를 썼다고 희화(戱畵)해 오늘날에도 바보 임금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철종의 집안은 역모와 연루되었다는 죄명과 신유박해로 연루되어 강화에 와 있었기에 자연히 유학교육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권문세가 정치인들의 노회(老獪)함에 힘없고 지식이 부족한 19세 촌 출신 임금이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천성이 착하고 순박했던 철종은 자신의 사비(私備: 內帑金)도 아껴 가며 빈민 구휼에 마음을 썼고 부정을 저지른 관원들을 엄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촛불로 어찌 바람 앞에 길을 밝히랴? 주나라의 주공(周公)이나 강태공 같은 신하가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천등고개를 넘으며 두 임금을 돌아본다.

순조의 비 순원왕후 영(令) 받은 철종의 울부짖음 버스의 안내방송이 사우동 김포시청 앞을 알린다. 이곳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면 김포시청으로 향하는 대로가 펼쳐진다. 김포시청은 장릉산(章陵山) 동쪽 기슭을 등지고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잠시 주차장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향토유적 14호 김포 선정비(善政碑)를 살펴 본다. 현령, 군수, 관찰사 등 10기(基)가 자리잡고 있다. 인조 이후 김포에 왔던 목민관들의 것인데 모두 일실되고 10기만 남은 것이다. 이곳은 본래 옛 관아 터가 아니었기에 모두 옮겨 온 것이다. 무수히 많은 선정비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문을 나서 시청 좌측(동쪽) 도로 장릉로를 오른다. 벚나무 가로수에서 떨어진 벚지가 도로에 가득하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우측(서쪽)으로는 장릉이며 좌측 언덕은 작은 유원지를 이루고 있다. 김포에 살고 있는 차인(茶人)이며 화가인 필자의 후배가 있는데 이곳에 오면 그 친구가 자랑하며 내게 맛보여 주는 삼계탕집도 이 언덕에 있다. 복(伏)날도 되었으니 어디 맛 한 번 보고 갈거나. 장릉 정문을 지나 잠시 나아가면 장릉공단을 알리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고 그 한 켠에 ‘한하운 시인 유택 200m'를 알리는 작은 표지가 붙어 있다. 여기까지는 친절했는데 이 표지를 믿고 찾아 갔다가는 한 나절 고생을 하게 된다. 길로 접어들자마자 ‘그때 그집’이라는 음식점을 만나고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 ‘장릉 아랫길’로 들어서자. 잠시 후부터는 좌측 산기슭에 무수히 많은 무덤들이 나타난다. ‘김포공원묘지’인 것이다.

입구로부터 약 600 여m 되는 지점에 ‘한하운 시인 유택 30m'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시인의 묘소는 7열 우측 3번째에 있는데 ’詩人 韓何雲 泰永之墓‘라는 비석을 만난다. 시인의 시라고는 ’보리피리‘ 한 수밖에 아는 것이 없는 필자이지만 배낭 속 물 한 컵 따르고 인사를 올린다. 생면부지 어린 친구가 이러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겠지. 미망인께서 세운 비석 뒷면에는 시인의 대표 시 ’보리피리‘가 쓰여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닐니리 그 시대 천형(天刑)이라고 불리는 한센병(문둥병)으로 세상과 떨어져야 했던 시인, 끝내 고향 함경도에 가지 못하고 타향에 묻힌 시인의 아픔을 보리피리로 함께 해 본 날이다. 이제 다시 돌아 나와 장릉(章陵)으로 향한다. 장릉(章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40기(基)의 능 중에 하나인데 누구의 능(陵)일까? 그 답은 원종(元宗)이다. 학창시절 국사를 배운 이들에게는 낯선 임금의 이름이다. 그 시절 조선의 임금 이름을 외우는 방법이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인데 어디에도 원종은 끼어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인조가 반정으로 임금이 된 뒤 자신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追尊, 追崇)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실제 임금이 되지 못했으나 후에 추존된 임금들이 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 20세에 세상을 떠나 임금이 되지 못했는데 후에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자 덕종으로 추존됐다.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도 양자로 입적한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됐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도 아들 헌종이 등극하자 추존됐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등극했으나 추존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된 것은 고종 때인 1899년이었다. 모두 세자로서 일찍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존한 것이다. 그런데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임금으로 추존했다. 김포공원묘지에 천형(天刑) 앓은 한하운 시인 잠들어 만일에 이와 같은 예가 정당한 것이라면 전대(前代)의 선조(宣祖)도 자신의 아버지 덕흥군을 추존해 임금으로 만들고, 후대(後代)의 철종도 아버지 전계대원군을 임금으로 만들고, 고종도 흥선대원군을 임금으로 추존해야 하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인조는 반정으로 자리한 임금의 위(位)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부친과 모친의 왕, 왕후 만들기 작업에 착수했다. 모친 능성 구씨가 돌아가시자 궐내에 빈소를 차려 3년 상을 치룰 것을 고집했고 이 곳 김포 북성산(北城山) 아래 장사지내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광해군 11년(1619년)에 사망해 양주 군장리에 묻혔다. 정원군운 광해군과 악연이 있었다.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역모에 얽혀 교동에 안치됐는데 목을 매 자결했다. 또한 임진란 후 궁궐 재건 당시 정원군의 집터에는 경덕궁(영조 때 경희궁으로 개칭)을 지었으니 이복형제 사이에 앙금이 쌓였다. 이런 일들이 쌓여 서인들은 정원군의 장자(형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실제로는 둘째) 능양군(綾陽君)을 내세워 반정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인조가 등극하자 정원군의 묘는 격상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는데 1627년에 이곳 김포로 이장했다. 따라서 육경원도 흥경원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됐다. 그러다가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촌하니 흥경원은 장릉(章陵)으로 바뀌고 왕릉에 걸맞는 능역(陵役)이 이뤄졌다. 이 시기에 북성산(北城山: 章陵 陵役 후 장릉산이라 부르게 됨) 아래에 있던 김포 읍치(邑治)도 이전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북성산은 현의 북쪽 2리에 있는 진산(在縣北二里 鎭山)’이라 했으니 바꾸어 말하면 김포현 읍치는 장릉산 남쪽 2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장릉을 포함한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인조는 이곳에 장릉을 조성한 후 김포현을 군(群)으로 승격시켰다. 장릉은 인조(仁祖)의 이런 무리수를 모두 보듬고 아름답기만 하다. 숲이 우거진 사이로 아늑한 흙길 산책로가 이어진다. 연지(蓮池)에는 연잎이 못을 메우고 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울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탐(貪)함을 어찌도 이리 감싸 주는 것인지. 1797년 추석날 정조가 차례(茶禮)를 올렸던 재실(齋室)도 잘 정비되어 있다.

능역(陵域)의 참도(參道)는 길기도 한데 봉릉산 기슭을 향해 멀고 높게 뚫려 있다. 그 끝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왕권을 돋보이게 하려는 인조의 의도가 엿보인다. 육경원 비를 세웠던 돌받침대도 우람하게 남아 있다. 무리를 해서 조성한 능이어서 그랬던지 불도 자주 났다. 알 수 없는 자연발화도 몇 번 있었고 숙종 24년에는 부천 사람 최필성, 안사현 등이 방화를 하기도 했다. 인조와 반정세력 서인들은 명분은 좋았으나 자신들의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웠을 뿐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은 고달프기만 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세간에 떠도는 노래가 실려 있다. 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嗟爾勳臣, 毋庸自誇)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爰處其室, 乃占其田)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且乘其馬, 又行其事)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爾與其人, 顧何異哉)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장릉(章陵) 주인공은 원종(元宗) 광해군 시절 권력층에게서 빼앗은 재물로 그들과 똑같이 떵떵거리는 혁명세력에 신물이 난 것이다. 이런 일들과는 무관하게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장릉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뒤쪽 장릉산(北城山)에는 50여년째 국가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 북성산고성(古城)이 이어졌다 한다. 석축으로 둘레는 1650척, 높이는 10척이라 했으니 규모 있는 석성인 셈이다. 또한 봉수대(烽燧臺)도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5개의 봉수 라인이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집결해 그날그날의 국경지방 변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이곳 북성산 봉수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는 제5라인으로 서해안을 거쳐 강화 남산~ 통진 남산을 통해 이곳 북성산 봉수에 이르고 양천 개화산을 지나 한양 목멱산(남산)으로 연결되던 봉수였다. 1760년 발행된 여지도서나 1860년 발행된 대동지지에는 냉정산(冷井山) 봉수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봉수관련 자료에서는 북성산이 냉정산이라 했는데 1872년 제작된 군현지도를 보면 냉정산은 북성산 동쪽, 고현내면 북쪽에 별도로 그려져 있고 봉수대도 그 곳에 그려져 있다. 아마도 봉수대 위치가 바뀌었으리라. 이제 장릉 문을 나선다. 장릉주변으로는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약 5km의 회주로가 있다. 장릉 펜스를 좌측으로 끼고 돌면 장릉후문을 만나고 여기에서 승가대학 방향으로 가면 산길 4거리를 만난다. 오늘은 펜스를 끼고 우측 길로 나선다. 고개 하나 넘으니 길은 국가시설물로 막혀 마을길로 내려간다. 산과 마을 사이에 걷기코스가 이어진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2차선 아스팔트길을 만나는데 국가시설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건너는 계단 아래 좌측으로 체육시설을 지나 길은 다시 장릉방향을 향한다. 그런데 곧 이 길은 많은 무덤들이 자리잡고 있는 고려공원이라는 묘역 길로 이어진다. 어렸을 적 가깝던 이들의 죽음을 맞아보지 못했던 시절에는 무덤이 낯설고 무섭기도 했었다. 이제는 묘역도 사람 사는 곳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햇볕아래 묘역은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하다. 1~2km 묘역 길을 지나면 길은 장릉 후문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4거리에 닿는다. 승가대학 방향으로 내려가자. 이윽고 2차선 포장도로인 승가로가 나온다. 여기서 좌측 길로 잠시 내려가면 금정사(金井寺)와 승가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금정사에는 유래 안내판이 있는데 전해오기를 신라 진흥왕 때 고상사(高上寺)란 절에서 시작됐고 기록은 없다 한다. 잠시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자. 불우(佛宇)조에는 고산사(孤山寺)가 망산(望山)에 있다 했으며, 산천조에는 망산(望山)이 현 남쪽 2리에 있다 했다. 그렇다면 장릉 자리에 있던 현(縣)의 남쪽 2리에는 지금의 금정산 말고는 달리 산이 없으니 금정산은 조선 전기에는 망산 또는 (포)망산으로 불리었고 금정사 자리에 있던 옛 절은 고산사(암)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72년 발행한 군현지도에는 이 산의 이름이 야미산(夜彌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고려 말 3대 선사 경한, 김포 망산 고산사에 은거 그런데 김포 망산 고산사(암)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불교사전과 민족문화백과사전에는 백운화상 경한(白雲和尙 景閑)이란 분이 소개되어 있다. 고려 말 태고 보우, 나옹 혜근과 함께 3대 선사로 꼽히던 분이었다. 백운화상 경한은 태고 보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석옥 청공(石玉 淸珙)화상의 법맥을 이어 받은 대선사(大禪師)였다. 이 분이 1369년부터 이듬해 1370년 9월까지 이곳 고산사에 은거했다. 그 뒤 잠시 나랏일에 나섰다가 여주 혜목산 취암사에서 1374년 입적했다. 이렇게 일반인들에게는 잊혀졌던 백운선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가 찾아내 인류최초의 금속활자가 고려에서 시작하였음을 밝혀내고 이윽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정해진 책 직지(直指),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백운화상 경한이었던 것이다. 책의 원제목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은 경전(經典)은 아니고 전대 선사들의 게(偈), 송(頌), 찬(讚), 명(銘), 시(詩) 등을 모은 책으로 목판본과 활자본이 있는데 활자본은 오직 하권만이 프랑스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宣光七年 丁巳 七月 日 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 門人 釋瓚 達湛 施主 比丘尼 妙德’이란 기록이 선명해 1377년(우왕3년) 흥덕사에서 찍은 책임이 의심에 여지가 없었다. 화상은 이곳 고산사에 은거할 때 이 책의 상당부분을 집필하신 것은 아닐까. 그 뒤 장릉이 들어서자 고산사는 능의 원찰인 봉릉사(奉陵寺)로 바뀌었고 폐사 됐다가 근래에 금정사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금정사를 떠나 뒷산 금정산으로 오른다. 산길은 흙길로 편안하다. 맨발로 걷고 싶다. 30여 분 걸어 내려오면 인천영어마을이 있다. 길을 건너면 서울과 부평으로 이어지는 버스편이 많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연대앞 672 / 광화문 8600 / 여의도 631, 1002 / 영등포 69, 88 / 일산 96 ~ 사우고교 김포시청 하차 걷기코스 버스정류소 ~ 김포시청 선정비 ~ 한하운 시인묘소(김포공원묘지) ~ 장릉 ~ 장릉 회주로 ~ 금정사(옛 고산사) ~ 금정산 ~ 원당동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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