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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 19 태평성대 기초 닦은 태종]카리스마와 인간미 겸비

명나라 사신에 엄격, 신하를 위해 종묘에 동서상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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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6호 박현준⁄ 2013.07.22 14:18:53

태종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군주다. 신권(臣權)의 상징인 정도전을 물리치고 왕권(王權)을 강화한 태종은 자신의 처가와 세자의 처가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외척이 발호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세종이 정국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잘 닦아놓은 탄탄대로가 결정적인 밑바탕이 됐다. 이 과정에서 태종의 이미지는 강하고 단호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태종은 자신감과 단호한 추진력이 넘치는 동시에 신하의 아픔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의 임금이기도 했다. 태종의 자신감과 살가움은 종묘에 그대로 살아 있다. 종묘 정전은 신위를 모신 감실의 몸채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이 몸채의 양 끝은 앞을 향해 직각으로 꺾여 있다. 이것이 동서월랑(東西月廊)으로, 몸체인 감실을 양쪽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서월랑은 태종 때 건축됐으며 중국에서 건축된 종묘 양식과는 다르다. 태종은 10년(1410) 4월 1일 종묘에 제사 지내는 신하들이 비나 눈을 피할 곳이 없음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그날의 실록을 보자. 종묘제사를 모시는 날에 만일 비나 눈이 오면 뜰 가운데에서 이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면 옷을 적시고 예의범절에 맞는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는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지 못하게 되고, 신이나 사람이나 편안하지 못할 것 같다. 마땅히 대기하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태종은 같은 해 5월 26일 직접 종묘에 가서 비를 피할 건축물을 세울 장소를 점검한 뒤 의정부에 명해 종묘의 동서상(東西廂) 건축을 의논케 했다. 그런데 중국의 종묘 건축과 다르다는 반대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해 태종은 ‘우리 식으로 하면 된다’는 의연한 입장으로 ‘조선의 법’이 되도록 새롭게 종묘 건축을 고안한다. 임금과 신하의 대화 내용을 보자. 태종: 만일 본체인 묘전(廟前)에 건물을 이어 지으면 컴컴하게 돼 불편할 것이다. 동서의 모퉁이 앞뜰에 10척(尺)의 건물을 이어 달면 좋겠다. 제사 모시는 날에 비나 눈을 만나면 나와 향관(享官)은 동쪽에 있고, 악관(樂官)은 서쪽에, 여러 집사관(執事官)은 묘실(廟室)의 기둥 밖에 있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제사 때 날씨가 궂어도 예의와 격식을 잃지 않고 경외감과 성실함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대언(代言) 김여지: 동서 모퉁이에 빈 건물인 허청을 짓는 것은 종묘제도가 아닙니다. 나중에 명나라의 사신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 태종: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는가. 혹시 사신이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할 것이다. 어찌 비난하거나 웃겠느냐?

태종은 명나라의 사신이 보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선에는 조선의 법이 있다는 주체적 생각이었다. 실제로 태종은 “우리가 대국을 섬기는 것은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예가 그런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재편된 동아시아 질서에서 사대는 외교관계의 형식일 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의 국왕으로서 명나라에 속박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 비를 맞는 신하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시기 어렵다는 현실도 고려했다. 바로 신하의 아픔을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태종이 초기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켜 조선왕국을 이룬 것은 강한 힘과 함께 이 같은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임금의 자신감은 4년 전인 태종 6년(1406년) 4월 명나라 사신 황엄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환관인 황엄은 명나라 영락제의 지시로 제주도 법화사의 미타삼존 불상을 구하러 조선에 왔다. 태종은 영락제가 불상을 빙자해 제주도를 정탐한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황엄이 제주도에 가지 못하도록 불상을 내륙으로 반출했다. 태종은 전라도 나주에서 불상을 접수한 뒤 한양에 올라온 황엄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관을 찾았다. 그런데 황엄은 태종이 미타삼존에 절을 하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 군주 중 유일하게 과거시험 합격 한국 군주 중 유일하게 과거시험에 합격한 태종은 유학 신봉자였다. 특히 고려시대 폐해가 심했던 불교에 대해서는 탄압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려 말에 10만 결에 이르던 사찰의 토지를 1만 결만 남기고 모두 국고로 환수시켰다. 불교계의 경제력 90퍼센트를 몰수한 셈이다. 이에 비해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와 사신 황엄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태종이 불상에 예불을 드리지 않으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이 뻔했다. 입장이 곤란해진 태종은 신료들과 상의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정승 조영무와 하륜은 “영락제가 불상을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황엄의 사람됨이 그릇됨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니 형식상 예불을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명나라와의 외교마찰을 피하고자 시늉만 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를 무서워하는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 어려움을 타개하겠다고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 아니라고 질책한 뒤, 황엄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두 정승을 믿고 불상에 절하지 않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모두 절을 하라고 한다. 나의 신하 중에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여러 사람이 황엄 한 명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에 임금이 어려움에 빠지면 누가 나서서 구하겠는가.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신하들은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임금은 몸가짐을 쉽게 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미타삼존에 절을 하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태종은 황엄에게 사람을 보냈다. 불상에 절을 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통첩이었다. 귀국해서 그가 영락제에게 비방하는 말을 해 양국 관계가 경색돼도 좋다는 배짱이었다. 과감한 행동을 택한 태종은 그러나 언어 표현은 다듬었다. 외교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제후국의 복과 화는 천자의 손에 달려 있지 불상에 달려 있지 않소. 따라서 천자의 사신을 먼저 만나야 하오. 어찌 내 나라의 불상에 절을 한단 말이오.” 황엄은 태종의 배짱과 자신감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이처럼 강력한 추진과 배짱을 지닌 태종과 이를 이어받아 태평성대를 연 세종을 어려운 상대로 여겼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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