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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 절터 가는 길 - 41]두물머리, 한음 이덕형 선생의 자취를 찾아

나라있음은 알되 몸있음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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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1호 박현준⁄ 2013.11.11 11:57:38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라는 재기 넘치는 야담(野談)의 주인공 중 한 분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만년 발자취를 찾아 길을 나선다. 선생이 가신지 어느덧 400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1613년 음력 10월 9일 오시(午時)에 두물머리 북한강 쪽 사제마을에서 돌아가셨다. 400년 전 강물이 맑아지고 산천의 색이 바뀌어가는 가을날 돌아가셔서 강 남쪽 산 좋고 물 맑은 중은동마을 뒷산에 잠드셨다. 중앙선 용문행 전철에 올라 운길산역을 지나고 두물머리의 북한산 줄기를 건너 양수(兩水)역에서 하차한다. 출발하던 서울과는 달리 얼굴을 스치는 공기가 산뜻하다. 한산한 역 앞 길을 건너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들어 계시는 묘소방향 목왕리로 가는 버스를 탄다. 사람이 많지 않는 농촌마을 노선이라서 버스 출발 간격이 길다. 09:41/ 11:39/ 12:51/ 15:21/ 17:11/ 20:35에 양수역에서 출발한다. 내리는 곳은 목왕3리(목왕삼거리)이다. 버스는 양수역 좌측 철도길 아래로 난 길을 지나 동쪽으로 간다. 잠시 10분 후 목왕삼거리에 도착한다. 택시를 이용하면 요금은 5000원 내외이니 시간이 안 맞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또한 양수역에서 이곳으로 가는 길은 양평의 걷기 좋은 길 ‘물소리길’ 코스이다. 산길과 들길, 개울길, 마을길 5.3km를 걸어 도착하는 곳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날에는 걸어도 좋은 길이다. 가는 길에는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선생 내외분 묘소도 있다. 길을 잠시 벗어나면 한음의 선대 영의정 이준경 묘소도 있다. 마을 사람들 이 지역을 정승골이라 부른다. 목왕3거리에 내리면 갈 길은 좌우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삼거리에는 개울을 건너는 작은 철다리 너머에 한음 신도비(新道碑: 경기도 문화재 89호)가 있다. 대제학 조경(趙絅)이 지은(撰) 것이다. 외정 때 개울에 버려졌던 것을 후손들이 다시 찾아 세웠다 한다. 글씨는 마멸되어 읽기 어렵다. 이곳에서 동쪽 산을 올려다보면 한음의 묘소가 올려다 보인다. 우뚝 해 상당히 가파르게 보인다. 오르는 진입길은 삼거리의 좌측길로 나아가야 한다. 안내판에 소나기마을이라고 쓴 방향이다. 길 앞쪽으로는 노란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고 옆으로 정갈한 해물한식집이 자리잡고 있다. 은행나무 앞으로 신도비 번역문이 병풍처럼 세운 화강암 벽에 새겨져 있다. 이가원 선생이 번역한 것이라 한다. 한음의 신도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知有國而不知有身(지유국이부지유신): 나라있음은 알되 자신의 몸 있음은 알지 못한다’ 했으니 선생의 나라사랑을 이처럼 절묘하게 표현한 구절도 없을 것이다. 잠시 주제를 벗어나 한음(漢陰)이란 호(號)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필이면 왜 陰(그늘)이란 말인가? 선생은 광주 이씨이다. 광주는 한강 남쪽이다. 한강 북쪽 양주땅이 한양(漢陽)이니 그 반대쪽 광주는 당연히 음(陰)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음(漢陰)이란 호는 한강 남쪽 땅을 뜻하는 호이다.

한음(漢陰)의 의미는 한강 남쪽 땅 요즈음 우리는 호(號)를 짓는다고 하면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호(號)를 짓는다. 지극히 고상하거나 예술적이거나 사변적이다. 옛사람들 호는 그렇게 고상하지 않았다. 쉽게는 자신이 낳은 고향의 산 이름이나 강 이름을 호로 삼은 예가 많았다. 은행나무 앞으로 돌아가니 수령 570년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570년 전 누가 이 나무를 심은 것일까? 한음 묘소 오르는 길 아래 자리잡은 절 지장사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이곳을 절골(寺村)로 부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러 사람 문집에 한음의 묘소를 찾아와 느낀 감회를 적은 글들이 남아 있다. 그 글에 남아 있는 이곳 지명은 차계동(叉溪洞) 또는 중은동(中隱洞)이다. 차계동(叉溪洞)은 두 개울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붙은 이름일 것이며, 중은동은 지금은 사라진 절 중은사(中隱寺)가 있었기에 붙은 지명일 것이다. 택당 이식(李植)은 한겨울 눈 내린 때 한음의 묘소를 찾아와 차계동 중은사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를 남겼다. 그 결구는 이렇게 쓸쓸하다. 강호에 눈비는 차가운데(江湖雨雪寒) 큰 산 같은 그 모습 어찌 다시 뵈오리(高山那更仰) 발길 돌리는데 한 해도 저무네(歸去歲將闌)

뿐만 아니다. 한음 자신도 ‘중은사 승 성묵(中隱寺 僧 性黙)’에 대한 시를 남겼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도 ‘차계동 중은사기(中隱寺基)’를, 청음 김상헌과 계곡 장유(張維)도 ‘중은사(中隱寺)’를 읊었다. 한음의 묘소를 찾는 이들에게 중은사는 으레 마음이 들려 가는 절이었던 것이다. 중은사는 과연 어디에 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마을 어른들도 아는 이가 없었다. 절골이란 말에 기대어 은행나무 주변을 살핀다. 그런데 반갑구나. 이제는 집터 닦고 밭 갈았건만 은행나무 밑에는 나이 먹은 기와편과 도자기편들이 수줍게 숨어 있었다. 이 은행나무는 절 마당에 있었던 나무였던 것이다. 500여년 전 절을 짓고 어느 선승이 절 마당에 심었던 묘목만 남아 거목이고 절은 자취도, 그 자리에 있었던 사실조차도 잊혀졌다. 이 터가 중은사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음 묘소 길목에 있는 절터이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청음 김상헌이 읊은 ‘중은사’를 뇌어 본다. 오래 전에 산사람과 약속 있어서(久有山人約) 스님 사는 오두막집 찾아 나섰네(行尋佛子廬) 매화꽃은 그 사이에 몇 번 피었나(梅花幾時發) 돌길에 푸른 나귀 타고 가네(石逕試靑驢) 은행나무에서 잠시 큰 길을 따라가면 우측 개울 너머에 정려문과 재실의 느낌을 주는 한옥이 보인다. 한음의 영정각(影幀閣)과 부인 한산이씨의 정려문(旌閭門)이다. 부인 한산 이씨는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딸인데 왜란이 일어나던 해 1592년 9월 강원도 안협(安峽) 백암산(白岩山)에서 왜병들로부터 몸을 지키려고 자결했다. 이에 선조가 정려를 세우게 했던 것이다. 한음의 묘 찾아 남긴 문집 다수 한음의 영정은 본래 30대에 화공 이신흠(李信欽)이 그린 것을 후에 궁중화가 이한철(李漢喆)로 하여금 여럿 모사하게 했다 한다. 지금 영정각에는 이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다. 영정각의 이름은 쌍송재(雙松齋)로 한음 이외에 공(公)의 또 다른 호 쌍송을 살린 것이며 건물 정문 한원문(漢原門)은 공의 군호(君號)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서 따온 것이다. 영정각을 나오면 산 아래로 지장사란 절이 보인다. 지장사 뒤로 잘 정비해 놓은 길로 산을 향해 가파르게 오른다. 오르기를 그친 평탄지에 한음과 부인 한산 이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위로는 부모님 묘소가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말끔히 정비를 해 놓았다. 양평 청계산이 서쪽으로 뻗어나간 혈처(穴處)에 묘는 자리잡고 있다. 시야가 시원하다.

이제 다시 양수역으로 돌아 나온다. 나오는 버스편도 많지 않다. 07:46/ 10:01/ 11:24/ 13:06/ 14:47/ 17:25/ 20:30 이다. 양수역에서 전철을 되돌아 타고 운길산역으로 나온다. 운길산 정상을 경유하여 수종사로 가기 위해서이다. 역에서 운길산 가는 길은 앞 쪽 차로가 아니라 뒤로 돌아서 진중리를 지나가는 길이다. 진중리 마을길이 끝날 즈음 좌측으로 수종사(水鐘寺) 오르는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예전 숲 속 오솔길이 어느 해부터인가 길이 뚫리고 포장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가파른 산길로 차가 다니니 주말 같은 경우는 매연길이 된다. 다행인 것은 매연을 싫어하는 이들이 개척해 놓은 숲길이 있다. 포장길 들어서서 잠시 오르면 좌측 숲속으로 들어가는 샛길을 만난다. 이 길은 작은 계곡을 끼고 숲속으로 뚫린 길이 되며 그 후에는 다시 좌측으로 능선길로 이어진다. 이 능선 길의 끝은 헬기장을 지나 운길산(雲吉山) 정상과 닿는다. 정상에는 고도 610m를 알리는 정상석과 안내판이 서 있다.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 멈춘다’는 설명인데 무언가 좀 궁색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젊은 날에 수시로 운길산과 수종사를 다녔다. ‘운길산에 올라[(上雲吉山)’라는 시를 보면,‘산을 바라보니 달리고 싶어(望山欣欲奔) 찬바람 겨드랑이에 일어나네(冷風生肘腋)’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남겼다. 운길산만 바라보면 오르고 싶어서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주목에는 이 산을 ‘조곡산(早谷山)’이라 소개했고 ‘주 동쪽 30리에 일명 초동산이라(在州東三十里 一云 草洞山)’ 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운길산과 조곡산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재의 운길산은 조곡산(早谷山)으로 지금의 적갑산, 철문봉, 예봉산 줄기는 운길산(雲吉山)으로 기록했다. 그러니 달리 예봉산은 없으며 예빈산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정확히 그려져 있다.

운길사·수종사 자주 찾은 다산 정약용 왕조실록에도 조곡산(早谷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과 세조, 성종이 조곡산에 사냥했던 일에 대한 기록들이다. 이제 수종사로 내려간다. 골자기에 붉은 단풍이 가득하다. 언제 이 길에 단풍이 가득 숨어 있었던가. 수종사에 도착한다. 언제 와도 수종사 절 마당은 따듯하다. 달리 돈을 받지 않는 다실(茶室) 삼정헌(三鼎軒)은 오늘 매우 한가하다. 창문 너머로 두물머리가 선계(仙界)처럼 내려다 보인다. 일시에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하다. 삼정헌(三鼎軒)은 솥단지 세 개에다가는 무엇을 담으라 하심인가. 맹자(孟子)에는 선비(士)라서 제사 때 세(三) 정(鼎)에 제수(祭羞)를 담고 대부(大夫)는 대부라서 오정(五鼎)에 제수를 담는 것이냐는 질문이 있다. ‘선(禪)과 다(茶)는 일미(一味)’라 했으니 나라면 우선 禪 한 솥, 차 한 솥 담고 나머지 한 솥에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두물머리 경관 한 솥 담으련마는…. 수종사에 오면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우선은 초의(草衣)와 다산(茶山)이다. 조선 초기 문인 사가정 서거정도 수종사를 주제로 한 시(詩) 두 편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다산은 수종사 아래 강마을 마재(馬峴)에서 자랐기에 운길산과 수종사를 앞마당 삼아 놀기도 하고 글읽기도 하면서 지냈다. 그 과정에서 유수종사(游水鐘寺), 춘일유수종사(春日游水鐘寺), 숙수종사(宿水鐘寺) 등 수종사를 사랑하는 시가 남았다. 그 중 14세에 지었다는 유수종사(游水鐘寺)를 읽어 보자 수종사에 노닐며(游水鐘寺) 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垂蘿夾危磴) 절간으로 드는 길 분명찮은데(不辨曹溪路) 응달에는 묵은 눈 쌓여 있고(陰岡滯古雪) 물가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晴洲散朝霧) 샘물은 돌구멍에 솟아오르고(地漿湧嵌穴)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퍼지네(鍾響出深樹) 유람길 예서부터 두루 밟지만 游歷玆自遍) 유기를 어찌 다시 그르칠 수야(幽期寧再誤) (기존 번역을 전재함)

대둔산의 다승(茶僧) 초의선사도 수종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초의는 세 번 서울에 올라 왔는데 조선시대에 승려는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서울에 오면 수종사와 수락산 학림암에 머물렀다. 스승 다산의 권유로 서울 상경에 오르기 시작했고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丁學淵 ), 정학유(丁學遊)를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한 그가 수종사에 머물 때 남긴 시(詩)가 전해진다. ‘수종사에서 석옥화상시에 차운하다(水鐘寺次石屋和尙韻)’ 12수가 그것이다. 석옥청공화상(石屋淸珙和尙)은 중국 임제종의 법을 이은 고승으로 태고보우대사에게 법을 전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법통(法統)은 한반도로 넘어 왔다. 이 말은 달마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온 석가모니불의 법통이 석옥청공에게서 태고보우로 넘어옴으로 불교의 법통이 한반도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석옥청공 대사의 시에서 운(韻)을 빌려 수종사에서 지낸 겨울 12수의 시를 지은 것이다. 그 중 한 수를 읽는다. 꿈 깨면 누가 앙산의 차를 내놓을까(夢回誰進仰山茶) 게을러 경전 보며 어둔 눈을 씻는다(懶把殘經洗眼花) 뜻 맞는 친구들 산 아래에 있으나(賴有知音山下在) 인연 따라 올라와 흰구름 집(수종사)에 머무네(家隨緣往來白雲家) 스님은 아마도 경전을 읽다 깜박 하셨나 보다. 그 때 중국 앙산에 혜적(慧寂)이 깨달음의 차를 권했을 것이고. 눈을 비비니 그곳은 수종사, 저 산 아래에 있을 두릉시사(杜陵詩社)의 벗들이 생각난다. 그러나 납자(衲子)에게는 갈 길이 있는 법. 눈 쌓인 수종사에서 차(茶) 한 사발, 선(禪)에 든다. 한음의 별서 터 알리는 500년 은행나무 수종사에는 아담한 승탑(浮屠)과 불탑이 있다. 1439년(세종 21년) 세조의 고모 정의옹주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부장품이었던 사리함과 부속물품들이 일괄로 1963년 보물259호로 지정됐다 한다. 불탑은 아담한 8각에 5층 석탑인데 규모가 작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금년 들어 보물 1808호로 지정됐다. 이제 해우소를 들려 절문을 나선다. 500년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떨구어 길손을 전송한다. 아랫마을 송촌리(옛 사제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1.8km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한음 이덕형 선생이 수종사 덕인 스님에게 주었다는 시(詩) 두 편을 써서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느림보길이라고 명명된 하산길이 이덕형 선생 별서터로 가는 길임을 알리는 예쁜 안내판도 서 있다.

갈잎 덮힌 길 조심조심 1.8km 내려오면 길옆으로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터가 있다. 별서(別墅)란 별장보다 작은 규모의 농막이란 뜻인데 스스로를 낮추던 겸양의 말이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사제(莎堤)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두물머리(二水頭) 위 용진강(龍津江)이라 불리는 북한강이 내려다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도 이곳에 용진이라는 나루가 표시돼 있다. 선생은 연로하신 부친과 자신의 은퇴 후 한거(閑居)할 곳으로 이곳 별서에 집을 지어 대아당(大雅堂)이라 하고 서실은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으로 애일(愛日), 마루는 진일(眞佚: 진정 편안하다), 두 정자는 이로당(怡老亭: 기쁘게 맞는 노년), 읍수정(挹秀亭: 좋은 경치를 끌어당기다)이라 이름 붙였다. 강 넘어 10리에는 어머니와 부인이 잠들어 있는 중은동이 있으니 당신의 사후지지(死後之地)와 별서를 가까이했던 것이다. 선생이 심으셨을 은행나무 두 그루는 별서터 마당을 채우고 있고 선생이 말 타실 때 짚었다는 돌 곁에는 실물 크기의 말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선생이 은퇴하자 이곳에는 여러 벗들이 다녀갔다. 그 가운데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남겼다. “漢水東흐로訪水尋山야龍津江디내올나莎堤안도라드니第一江山이임업시려다(漢水東땅으로 訪水尋山하여 龍津江 지나 올라 莎堤 안 돌아드니 第一江山이 임자없이 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선생은 이곳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10월 9일 돌아가셨다. 향년 53세였다. 선생의 유해는 용진나루건너 중은동 부인 곁에 잠드셨다. 교통편 중앙선 용문행 양수 하차 ~ 버스환승 ~ 목왕3거리 하차 목왕3거리 ~ (버스) ~ 양수 ~ (전철) ~ 운길산역 제마을 연세중앞 ~ (버스 56번, 167번) ~ 운길산역 ~ 서울 걷기 코스 목왕3거리 ~ 신도비 ~ 은행나무 절터(중은사지?) ~ 한음 영정각 ~ 한음묘소 ~ 목왕3거리 ~ (버스) ~ 양수역 ~ (전철) ~ 운길산역 ~ 운길산 ~ 수종사 ~ 한음별서(사제마을) ~ 연세중 ~ (버스) ~ 운길산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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