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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45 (下)]양평 용문사~잊혀진 절터~기와가마터~상원사~보리갑사지~연수리

대사면 단행한 날, 하늘엔 ‘관세음보살’…세조, 상원사 행행해 쇠락한 고찰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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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3-364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1.27 16:43:08

용문사에서 출발하여 산등성이 길을 돌아 나오면 정갈한 절 상원사(上元寺)가 나타난다. 용문산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절이다 보니 여름날 계곡을 찾는 이들 아니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원사는 용문산 고찰 중 하나이다.

여말 선초(麗末 鮮初)의 기록들에는 용문사를 대표하는 절로는 보리(갑)사(菩提岬寺), 용문사(龍門寺), 사나사(舍那寺), 상원암(上元庵, 현 상원사), 윤필암(潤筆庵), 소설암(小雪菴), 죽장암(竹杖菴) 등이 있었다.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상원암도 보리갑사, 용문사와 같이 신라 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층계를 오르면 아담하고 정갈한 절 마당이 길손을 맞는다. 찾는 이 드물어 고요한 절 마당에는 3층 탑이 단정히 서 있다.

멀리 산길을 걸어온 길손의 목을 축이라고 시원한 샘물은 수량 풍부하게 흘러나온다. 대웅전 축대 아래에는 절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 옆에 목판인쇄 그림을 옮겨 놓은 작은 그림판이 서 있다. 곰곰이 살펴보니 첩첩 산중에 절이 자리하고 절 위 하늘에는 관세음보살이 화현(化現)해 계신다. 이것이 무슨 그림일까?

조선 초 문신 최항(崔恒)의 글에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라는 목판본 책이 있다. 그 책 속에 새겨 있는 그림이다. 내력은 이렇다.

세종 32년(1450년)에 임금이 편찮으셔서 “소윤(少尹) 정효강(鄭孝康)을 용문산 상원사에 보내어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병 나으라고 산천에 드리는 제사)를 베풀게 하였다. 임금께서 불정심다라니를 사경케 하고 승려들에게 독송케 하였다.(遣少尹鄭孝康于龍門山上元寺, 設救病水陸齋。上欲令寫佛項心陁難哩, 使僧徒讀誦)”는 것이다. 이 해 여름에 형님 효녕대군은 종을 주성(鑄成)하여 상원사에 시납(施納)하였다. 이렇게 맺어진 왕실과의 인연은 세조 때 와서 세조가 친히 상원사에 행행(行幸)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임금께서 상원사에 거둥할 때에 관음보살이 현상(現相)하는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백관들이 전(箋)을 올려 경하 드리니, 교서를 내려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외에는 모두 용서하도록 하였다.(上幸上元寺, 時有觀音現相之異, 百官進箋陳賀, 下敎赦謀反大逆、謀反、子孫謀殺歐罵祖父母·父母、妻妾謀殺夫、奴婢謀殺主、謀故殺人、但犯軍令·盜强外罪)”

세조는 이 때의 일을 최항으로 하여금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게 했던 것이다.

이 때 기록이 최항의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로 남아 있다.

(... 曇華殿上 白雲聳上 化作白衣觀音菩薩 身長可三丈餘 天衣長又加一丈餘 圓光燦爛 五色疊成...). 담화전 위로 흰 구름이 피어올라 관세음보살 모양으로 화하니 세조가 너무 기뻐하여 상원사에 쌀 200석을 하사하고 중죄인을 제외하고는 나라에 대사면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쇠락한 상원사를 중창하니 상원사는 번듯한 절이 되었다.


최항의 관음현상기에 나오는 세조의 대사면 일지

상원사 뒤 골짜기로 오르면 약 500m 지점, 골짜기가 Y자 형태로 갈라지는 지점에 옛 절터가 있다. 주위에는 산죽(山竹)이 가득한 곳이다. 옛 기록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죽장암(竹杖菴)터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골짜기 물이 상원사 식수로 사용되다 보니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색이 쓴 죽장암중수기(竹杖菴重修記)가 전해진다. 옛날 이 절에 도를 깨달은 사람이 있어 “군왕에게서 대지팡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죽장(竹杖)으로 편액(扁額)하였다”는 절의 연원이 기록되어 있다.
깨달은 이가 누구인지 군왕은 누구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골짜기에는 또 하나 유서깊은 절터가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좌측 계곡을 따라 1.5km 오르면 용문산 정상과 장군봉을 잇는 능선 아래 계곡 옆으로 윤필암(潤筆庵)터가 있다. 동문선에는 이색이 지은 윤필암기가 전해지고 있다.

▲상원사 승방


고려 중엽 정안군부인의 시주로 창건한 절이라 하는데 고려 말 이색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이색(李穡)은 여말(麗末) 문장가로 나옹선사의 비명(碑銘)을 지었는데 그 문도들이 윤필물(潤筆物: 글에 대한 謝禮物)을 보내왔기에 그것을 이 암자에 시주하여 중창하게 된 것이다.

윤필물로 중창한 절이었기에 사명(寺名)도 윤필암이라는 되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아직도 중건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상원사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다시 중건하여 법등(法燈)을 밝혔으면 좋겠구나.

전회(前回)에서 소개했듯이 허목 선생의 미수기언에는 용문산 정상 가섭봉 아래 묘덕암, 묘덕암 아래 윤필암, 이어서 죽장암, 상원사, 묘적암, 보리사가 일렬로 소개되어 있다. 즉 용문산 정상에서 남으로 선을 이으면 이 절들이 계곡 주변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상원사 절 마당을 둘러보면 눈에 띠는 옛 물건이 두 가지 있다. 사자상(獅子像)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낡은 석등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 범종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사자상석등은 세월을 머금은 채 화단 구석에 잊혀져 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범종(梵鐘)은 한 때는 국보(國寶)라는 귀한 몸이었다가 이제는 천덕구니가 된데다 일본종이라는 미움까지 받는 슬픈 종이 되었다. 상원사는 융희원년(1907년) 이전에 장천사교(張天師敎)라는 도술을 닦는 집단이 절을 차지한 일이 있어 법등이 유린되었다.

▲상원사 승방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한 속임수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무장해제 되고 이어서 군대해산이라는 치욕을 맞게 되자 전국에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가 절이라는 이유로 불태워졌다. 이 때 남은 상원사 건물은 법당뿐이었다.

다행히 범종은 남아 있었는데 1909년(융희 3년) 환속한 승(僧) 정화삼이란 자가 일본인에게 팔아먹는 수난을 당했다. 그리하여 이 범종은 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 별원(本院寺 別院)에 걸렸고 일본인들은 이 범종의 가치를 알아보고 1939년 보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해방이 되자 이 종은 국보 367호로 지정되는 영광을 맞는다. 그리고는 한국불교의 본산 조계사로 옮겨졌다.

그러나 국보의 영예도 오래가지 못하고 이 종은 진품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황수영 박사 등의 주장은 이 종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추정하기를 원래의 상원사 종은 일본인들이 빼돌리고 이 종은 근세의 일본 종으로 바꿔치기 되었다는 것이었다. 1962년 이 종은 끝내 국보에서 해제되었다.

▲상원사종


100년 만에 돌아온 상원사 종에 얽힌 미스터리

1972년 서울대 남천우 박사는 이 종이 중국 종에서 신라 종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진품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 근래에는 키스트 도종만 박사팀이 이 종의 금속 구성비율(Cu, Sn 등)이 신라범종 화학조성과 유사하고, 납동위원소 분석결과 우리나라의 진품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과연 이 종은 어떤 종일까? 신라나 고려 초에 주조한 우리 상고시대의 종일까? 아니면 효녕대군이 만들어 시납(施納)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조선 초의 종일까? 그도 아니면 바꿔치기한 일본 종일까?

상원사종은 이곳을 떠난 지 대략 100년 만에 상원사로 돌아왔다. 원래 그 종인지 바꿔치기한 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범종각 하나 제대로 없이 헛간 같은 종각에 모진 바람을 맞고 초라하게 걸려 있다. 종이야 어떤 종이든 그 진위는 후세에 지혜를 가진 후손들이 밝혀줄 것을 믿고 이제라도 범종각 하나 지어 미망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인도하는 종소리를 내 주었으면 좋겠다.

▲상원사 여래불


종각에서 바라 본 대웅전에는 주련이 시비(是非) 말라고 한 마디 거든다. 종소리는 아마도 이러한 시비 너머에 있을 것이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는 보는 바 없으니 분별이 없고
이불청성절시비(耳不聽聲絶是非) 귀로는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가 끊겼네
분별시비도방하 (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를 모두 내려놓고
단간심불자귀의 (但看心佛自歸依) 단지 마음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 것

부설거사(浮雪居士)의 게송이다. 거사는 일찍이 출가승이었는데 어느 시주 집 딸이 결혼하겠다고 하여 환속하였다. 그런데 거사는 속세에 살면서도 함께 수도하던 스님들보다 그 도가 깊었다. 도는 시비 너머에 있는가 보다.

이제 상원사를 떠난다. 대중교통은 없다. 아스팔트길을 걸어 내려간다. 숲속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지루하거나 불편함은 없다. 미수기언에 기록된 상원사 아래 묘적암(妙寂菴)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곧바로 보리사지(菩提寺址)를 찾아간다. 보리사지까지는 약 3km 길이다. 광활한 빈터에 선운사라는 근래의 절이 자리잡고 있다.

▲대경대사탑비 국립박물관


광활한 절터가 보여주듯 보리사는 나말 려초(羅末 麗初) 이 지역 대찰이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전국에 자복사(資福寺)라 하여 기도드리는 절을 정했었는데 이를 명찰(名刹)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지평현(砥平縣)의 명찰은 보리(갑)사(菩提(岬)寺)였다. 용문사가 아니라 보리사가 선정된 것은 이 시대까지만 해도 보리사가 용문사보다 더 큰 절이었던 모양이다.

보리사 터에서 만난 선운사 스님은 보리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1910년대 일제(日帝)에 의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벌어질 때 방치되어 있던 보리사지는 대부분 이 지역 어떤 사람이 자신의 토지로 점유하여 절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절터에 서 있던 승탑(부도)(僧塔: 대경대사 승탑으로 추정)과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도 관리하는 이가 없자 서울로 반출되었다는 것이다.

승탑(부도)은 1913년 반출되어 남산 일본인 집 마당 조경물로 쓰이다가 이화여대 총장사택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보물 351호) 옮겨진 사연에 대해서 스님은 목소리를 높인다. 당시 종단에 C스님은 이대 K총장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 부도를 K총장이 아름답다고 하자 가져가시라 했다는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전말이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이 승탑은 이대총장사택에 서 있어 박물관과는 달리 일반인의 자유관람이 쉽지 않다.

▲보리사지


또한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대경대사탑비(보물 361호)는 1914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지금은 국립박물관 뜰에 세워져 있어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가 있다. 비문도 비교적 선명하여 읽는 데는 문제가 없다. 원문과 번역문이 봉은본말사지에 실려 있고 문화재청의 금석문자료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비명은 매우 길다. 고려국 미지산 보리사 고교시대경국사 현기지탑 비명병서(高麗國 彌智山 菩提寺 故敎諡大鏡國師 玄機之塔 碑銘幷書). 대경국사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연수리 마을엔 1930년 세워진 유서깊은 성공회 건물

절터에는 근년에 세운 선운사가 있다. 일대가 모두 보리사 영역이었다 하니 지금의 보리사터라고 하는 곳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문화재 당국에서 한 부분을 시험발굴 한 후 덮어 놓았다. 부디 소중한 그 날의 문화유산이 발굴되었으면 좋겠다.

▲대경대사탑비 국립박물관


이제 연수리 버스정류장으로 나온다. 도보로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문제는 연수리에서 용문역으로 가는 버스가 드물다는 것이다. 우선 용문에서 출발하는 연수리행 버스는 7:10분, 9:00분, (11:00분), 12:00분, 15:40분, (17:00분), 19:00분에 출발한다. 이 버스는 15분~20분 뒤에 연수리에 도착하여 돌아나간다. 이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야한다.

그나마 주말에 버스가 운행하지 않으니 주의를 기울이실 것. 그런데 용문에서 연수리까지는 7~8km 거리이니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무방하며, 걷기코스를 거꾸로 하여 상원사에서 용문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버스시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수리에서 버스시간에 잠시 여유가 있다면 들려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연수리 마을 안쪽에는 자그마한 성공회가 있다. 1930년대에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이다. 이곳에 성공회가 있다기에 호기심이 생겨 들려 보았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30여명의 오랜 신도들만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침 옛 건물을 헐고 신축건물을 세워 신도들이 나와 노력봉사를 하는 날이었다. 강화의 성공회가 그렇듯이 편안함이 느껴진다.

▲연수리성공회


성공회는 학생 시절 배운 세계사 지식으로 돌아보면 영국의 왕 헨리8세와 교황 클레멘토 7세 사이의 의견불일치에서 생겨났다. 당시는 로마교황청의 힘이 강하여 교회법정이 개별국가의 사법권 위에 있었으니 국왕으로서는 얼마나 숨이 막혔겠는가. 심지어 비오5세는 여왕 엘리자베스1세를 파문했으니 영국교회는 로마가톨릭과 완전 결별하여 독자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온다. 오늘은 용문장날이다. 용문장날은 5, 10일장이다. 장에 들려 아침에 보아둔 돼지감자와 석류를 좀 사 보아야겠다. 그리고 텁텁한 지평막걸리 두어 병 사가야겠다. 그 맛을 아는 친구들이 있으니.


교통편
중앙선 전철 용문역 하차 ~ 역 앞에서 용문사 행 버스 환승.
(귀가) 연수리에서 버스 ~ 용문역 하차 ~ 전철

걷기 코스
용문사 경내(시비, 정지국사 부도, 은행나무, 관음전, 부도밭) ~ (상원사 방향) ~  잊혀진 절터 ~ 기와가마 ~ 상원사 ~ 보리갑사 지(현 선운사) ~ 연수리(성공회)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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