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마저 보이지 않는 절…정녕 허허로움도 비켜가네
백제의 큰 절 대통사지는 아쉽게도 주택가 조그만 공원 안에 단 하나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남아 있다. 본래는 이곳을 천 몇백년 동안 지켜온 토박이일 것인데 어쩌면 이리도 낯선 도회지에 불쑥 나타난 촌아이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금당(金堂)도 탑도 부처도 다 어디로 가고 너만 이 옹색한 자리를 지키고 있단 말이냐?
산성시장을 지나 공산성(公山城)으로 향한다. 1일과 6일이 장날인데 주변 농촌 어르신들이 가지고 나오는 농산물도 볼 만하다. 산성시장을 지나 우측 큰 길을 건너면 공주성이다. 한원당이라는 이름의 금방(金房) 골목으로 들어서면 공주성의 정문이 되는 남문(南門: 편액은 鎭南樓)에 닿는다.
조선시대 삼남대로(해남대로) 길은 바로 이 문을 통했던 것이다. 옛 지도를 보면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성의 북문인 공북루를 통과한 후 성 안길을 걸어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대로였음을 알게 된다. 안내판 설명에는 예전에는 토성(土城)이었는데 조선 초에 석성을 쌓고 지금 같은 누각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토성 시절의 성문(城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400년 전인 서기 660년 7월 18일, 아마도 이 문을 통해 성을 나섰을 한 임금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義慈王)이었다. 의자왕은 낙화암이 있는 사비성(부여)이 아니라 이 곳 웅진성에서 백제의 마지막 날을 맞았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18일,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의 영군(領軍) 등을 데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이것이 무슨 일인가?
사비성(부여)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의자왕은 7월 13일 좌우를 거느리고 한 밤을 틈타 이 곳 웅진성으로 피한다(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그러나 이도 소용없는 일, 5일 만에 항복하여 포로의 몸으로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으로 끌려갔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영영 북망산(北邙山) 원귀(寃鬼)가 되었다. 이 때 함께 끌려 간 포로가 왕자와 대신, 장군 등 88명 그리고 일반 백성 1만2907명이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과는 달리 당나라 사서(史書)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의미심장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모시고) 와서 항복했다(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 구당서
“그 장수 예식이 의자왕과 항복했다(其將禰植 與義慈降).” - 신당서
소정방에게 항복한 당사자는 웅진성 성주(城主)인 예식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성주 예식의 모반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흥미로운 사실은 2006년 낙양(洛陽)의 골동품상에서 발견된 당나라 대장군 예식진(禰寔進)의 묘비명이었다. 그는 백제 웅천(공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웅진성 성주 예식과 당나라 대장군 예식진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그는 배신을 통해 당나라에서 출세했던 것 같다.
배신이 없었다면 비록 사비성은 함락되었을지라도 지방의 모든 성(城)이 온전했던 백제가 그렇게 허망하게 망할 수 있었을까? 나라를 팔아 개인의 영달을 얻은 사람이 이 땅에 있었다는 사실이 남문을 들어서는 내 가슴을 슬프게 한다.
공산성의 다른 이름은 공주성, 쌍수산성, 웅진성이었다. 옛 지도를 보면 성안에는 두 개의 절이 있었다. 남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절이 망월사(望月寺)이며 동북쪽 금강을 면하는 곳에 자리잡은 절이 영은사(靈隱寺)였다. 영은사는 지금도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건만 망월사는 흔적도 기록도 없이 옛 지도에만 남았다.
웅진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문주왕이 허둥지둥 이곳으로 천도하여 어찌 보면 망명정부를 꾸린 475년부터였다. 한강기슭 위례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왕자(왕제)로서 이곳으로 왔으니 권력의 뿌리가 든든할 리 없었다. 부리나케 토성을 개축하고 수도로 삼았는데 이곳에 권력의 뿌리를 둔 귀족 세력의 힘을 누를 수가 없었다. 끝내는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왕을 시해하였다. 뒤를 이어 어린 삼근왕(三斤王)이 등극하였는데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이어 즉위한 동성왕(東城王)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공주성 성주 예식의 배반과 의자왕 굴욕
외교적으로도 신라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아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그도 가림성(현 임천) 성주 백가(苩加)의 자객에게 상해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걸출한 왕 무령왕(武寧王)은 백제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워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본인도 62세까지 활약하는 등 천수를 다하였다. 이런 안정된 국가 기반 위에 즉위한 성왕(聖王)은 더 큰 뜻을 품고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니 63년(475~538년) 웅진백제시대는 마감되었다.
웅진성은 역사 속 시대의 아픔이 많은 곳이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이곳에 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점령지를 다스렸으니 나라 잃은 백성들의 아픔은 어떠했겠는가.
그후 후기신라 헌덕왕 때(822년) 이곳 성주는 무열왕(武烈王)의 후손 김헌창(金憲昌)이었는데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그는 이곳에 장안국(長安國)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공표하였다. 멀쩡한 신라국 한 복판에 새로운 국가를 선언했으니… 그는 신라군의 토벌 대상이 되어 일전을 겨루었으나 끝내 패퇴하여 이곳에서 자결한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고려가 이 땅에 주인이 된 후, 8대 현종은 거란의 2차 침략을 받는다. 대량원군 시절 암살의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나 즉위했는데 정신도 가다듬기 전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 침략을 받으니 현종은 이곳을 거쳐 나주까지 몽진길에 오르기도 했다. 무신정권 시절에는 이 지역 출신 망이 망소이가 봉기하여 공산성을 점령하였다. 이들의 봉기는 끝내 실패했으나 고려의 천민에 대한 정책을 개선하는데 큰 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 공산성은 인조(仁祖)와 연(緣)을 맺는다. 이괄의 난이 터지자 인조는 이곳 공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그 때의 일이 인조실록(2년 1624년 2월)에 남아 있다.
“대가가 천안군을 떠나 공주(公州)로 향하였는데, 닭이 울기 전이었다. 의논하는 이들이 ‘남은 적이 저돌하면 행재소를 놀라게 할 걱정이 없지 않으니 공주로 급히 가서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것만 못하다.’ 여겨 밤에 떠났다.
(大駕發天安郡向公州, 鷄未鳴矣. 議者以爲: ‘餘賊豕突, 不無震驚行在之患. 莫若急往公州, 入保山城.’ 故侵夜發行.)” 인조는 이렇게 2월 13일부터 18일까지 5박 6일을 이곳 공산성에 피난했던 것이다.
또 하나 아쉬운 일이 있다. 한말 동학군(東學軍)은 승승장구하여 공주관아로 입성하려 했는데 공주여고 남쪽 고개 금학동 우금치에서 토벌군에게 전멸당한 일이 있다. 수입제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토벌군의 화력에 눌려 공주 입성에 실패한 것이다. 그들이 입성했다면 이곳 공주성은 그들의 주둔지가 되었을 것이고 민중혁명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건만 아쉬운 바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성(城)을 한 바퀴 돌아본다.
석성(石城)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지만 1500년 전 웅진백제 시대에 쌓은 토성(土城)이 일부구간 남아 있다. 변함없이 남아 있는 토성을 보면 백제의 토축(土築)기술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미 서울의 풍납토성을 발굴할 당시 백제의 흙 쌓아 올리는 기술수준은 현대인도 따를 수 없는 수준임이 증명된 바 있다.
성벽과 성문은 복원되었고 성 안에 있던 주요한 건물들도 복원되었다. 백제시대 왕궁지로 추정되는 지역도 발굴이 끝났는데 눈에 띄는 것은 높은 지역에서 정교하게 파내려간 우물이다. 일본에 가면 각 성(城)의 번주들이 식수 확보를 위해 성(城)에 뚫어 놓은 우물이 많은데 그 전형(典型)을 보는 듯하다.
삼국사기에 기록한 동성왕 22년(500년) 궁 동쪽에 세웠다던 높이 5장(丈)의 임류각(臨流閣)도 복원되어 있고(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 養奇禽),
인조의 피난시절 기대었다던 두 그루 나무를 기념해 지었던 쌍수정(雙樹亭)과 사적비도 복원하고 보호각에 자리잡게 했다. 쌍수정 앞 안내판에는 인절미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피난 온 인조에게 한 백성이 진상한 떡이 있었다 한다. 임금이 너무 맛있어 그 이름을 물으니 임씨 성을 가진 이가 썰어온 쌀떡(切米)라 했더니 임금이 ‘절미(絶味)로구나’ 했다 한다. 이후로 임씨의 절미라 하여 ‘임절미’가 되었다가 다시 ‘인절미’로 되었다 하니 인절미는 공주의 떡이라는 이야기이다.
한편 부끄러운 일이지만 정유재란 때 이 지역에 주재했던 명나라 세 장군을 기념하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도 비각에 잘 보존하였다. 기왕지사(旣往之事) 부끄러웠던 과거이지만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는 이 시기에는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성 남문 의자왕은 이 문을 통해 唐으로 끌려 갔다.
산성 안의 절 영은사는 살아 숨 쉬는 역사
산성 안 절 영은사(靈隱寺)는 이 산성에서 유일하게 유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산 역사이다. 전해지기로 백제의 절이라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았고 적어도 고려 초부터는 존재했던 절이다. 그러니 이 절은 고려 현종도 마이 망소이도 거쳐 갔을 것이다. 임진란 때에는 승병장 영규(靈圭)대사와도 인연을 맺어 승병의 합숙소로 쓰였고 인조는 피난 6일 이 절과 인연을 맺었다. 세조 때에 묘은사(妙隱寺)였던 절 이름이 그 후 영은사(靈隱寺)가 되었으며 공산성도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절 앞 강가 쪽으로는 전망 좋은 만하루(挽河樓)가 있다. 그 뒤에는 연지(蓮池)라는 깊이 9m가 넘는 연못이 있는데 금강의 물을 적군 모르게 지하로 끌어 쓸 수 있게 한 시설이다. 영은사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모습은 아름답다.
원통보전 관세음께서 쉬어 가라 하신다. 관일루 마루에 앉아 한 식경 금강을 물결을 바라본다. 스님조차 보이지 않는 절집은 허허로움도 비껴간 듯하다.
이제 길을 나선다. 서쪽문 금서루(錦西樓)를 향해 간다. 연전(年前) 성안마을에 있던 연못 바닥을 발굴하던 중 세상을 놀라게 할 유물이 발굴되었다. 연대가 정확히 기록된 찰갑(札甲: 비늘모양 철편을 가죽 끈으로 이은 갑옷)이 발견된 것이다. 표면에 씌여 있는 글씨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정관 19년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인데 645년으로 의자왕 5년이다. 백제의 것인지 당나라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궁금증을 더 하게 한다.
금서루를 나서면 그간 공주성 목민관을 지냈던 이들의 불망비(不忘碑,頌德碑, 功德碑)가 도열해 있다. 무엇 잊지 못할 덕(德)을 그리도 많이 쌓은 것일까? 길 건너고 제민천 다리를 건너면 좌측 낮은 산등성이에 황새바위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1800년대 천주교 박해 때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를 감영이 있는 공주로 압송하여 이곳에서 처형한 아픔의 장소였다.
항쇄(項鎖: 죄인의 목을 끼우는 널판)를 끼워 가두고 처형했는데 이름이 기록된 이만 248명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10살 여아(女兒)에서부터 84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처형했으니 벼슬아치들의 잊지 못할 공덕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산책하며 묵상할 수 있는 길을 잘 가꾸어 놓았으니 신자가 아니더라도 무령왕릉 가는 길에 들려 가는 것이 좋다.
길을 건너면 나지막한 언덕에 무령왕릉(武零王陵)이 자리잡은 송산리(松山里)고분군이다. 1971년 7월은 해방 후 가장 큰 고고학적 발굴이 있던 날이다. 일반인에게 공개하던 5호분 6호분에 습기가 차자 배수로 공사를 하게 되었다는데 6호분과 비슷한 벽돌배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7월 9일 해방 후 최대, 최악의 발굴이 17시간 만에 끝을 맺었다.
삼국시대 유일하게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던 왕릉의 처녀발굴이었고, 제대로 실측도는 물론 발굴정황마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최악의 발굴이었다. 큰 유물을 수습한 후 나머지는 풀뿌리와 함께 자루에 쓸어 담은 발굴이었다 하니 있을 수 없는 발굴과정이었다. 과정은 그렇다 치고 무덤의 주인 무령왕과 왕비의 묘지석을 비롯하여 46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묘지석(墓誌石)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癸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巳八月 /癸酉朔十二日甲申安居 /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백제 사마왕이 62세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12일에 올려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또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왕이 토왕 토백 토부모의 여러 관리에게 2000석의 돈을 주고 묘지(墓地)용 땅을 샀다(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買申地爲墓)는 점이다.
생(生)의 세계와 사(死)의 세계는 그 주인이 다른 세계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비록 지상의 왕이라 하여도 자신의 영혼이 잠들 땅을 이렇게 돈을 주고 구입하여 매지권(買地券)을 작성하고 잠들었는데 1400여 년 뒤 후손들은 예의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파헤쳤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공주박물관장 ㄱ씨는 주요 발굴품을 챙겨 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박대통령에게 보였다니 어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그래도 이렇게 수습된 유물은 공주박물관에서 후손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왕릉급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무령왕릉과 같은 구조의 벽돌무덤 6호분이 있다. 1933년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발굴 조사한 것인데 이 때 발굴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같은 구조의 무덤이니 누구의 무덤이었을까?
한편 무령왕의 지석을 보면 죽음을 붕(崩)이라 표현하였다. 형식상이라도 중국 양나라를 천자국(天子國)으로 삼았으니 백제는 제후국(諸侯國)인 셈이다.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 해야 한다.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 했으니 백제에서는 무령왕을 천자(天子)와 같이 생각했다는 뜻이다.
무령왕은 실추된 백제의 왕권을 굳건히 하고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임금이다. 그런 임금이니 일반 왕은 아니고 대왕(大王)으로 여긴 듯하다. 그런데 무령왕은 출생이 미스터리하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 했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또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무령왕의 탄생기가 기록되어 있다.
“加須利君則以孕婦 嫁與軍君曰 我之孕婦 旣當産業 若於路産 冀載一船 隨至下處 速令送國(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昆支)에게 시집보내면서 이르기를: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약 노정(路程)에 출산하면 배를 태워 어디에 있든지 속히 우리 나라로 돌려 보내라)” 했다는 것이다.
1933년 무령왕릉 발굴품 어디로 갔나?
일본서기(日本書紀)나 백제신찬(百濟新撰 )에 의하면 곤지는 개로왕의 아우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들인데 그 부인을 시집보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어서 일본서기에는 부인이 각라도(各羅島: 현 북규슈 사가현 加唐島(가까라지마))에서 무령왕을 출산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사가현(佐賀縣) 요부꼬(呼子)에는 加唐島를 왕래하는 선편이 매일 4차례 있으니 이곳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다녀오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다.
무령왕 출생의 비밀은 후세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묘역 서북쪽에 있는 공주박물관으로 향한다. 무령왕릉 출토품을 비롯하여 공주, 충청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공주에 가시거든 들려 보는 것이 좋다.
박물관을 나와 동쪽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르면 정지산 유적지에 닿는다. 정지산(艇止山), 배가 멈춘 산이란 뜻이다. 산의 모양이 배가 멈춰선 모양이라는데 궁색한 해설이다. 어쩌면 한성을 버리고 이곳에 올 때 피난 배들이 멈춘 산기슭은 아니었을까? 정(艇)은 배 중에서도 빠른 배이니…
1996년 이곳에서는 웅진 시대의 건물지가 대거 발굴되었다. 특이한 건물지와 함께 제기(祭器) 및 얼음창고 시설도 발견되었다. 무엇 하던 곳이었을까? 무령왕비의 빈전(殯殿)일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제기되고 있다.
왕비는 지석(誌石)에서 보듯 서방에 장사지냈다가(喪) 27개월 만에 다시 개장했다(葬). 즉 이곳 정지산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여 27개월 뒤 무령왕과 합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정지산은 이처럼 백제시대 왕가의 상장례(喪葬禮)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길을 내려오면 공주중학교가 있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터미널 행 버스에 오른다. 공주, 잊혀져가는 백제를 다시 만난 곳이며 백제와 일본을 연결할 키를 쥐고 있는 무령왕이 잠든 곳이다.
교통편남서울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 ~ 공주터미널 ~ 환승 108/125 버스 ~ 옥룡동 주공아파트
걷기코스
대통사지 ~ 산성시장 ~ 공산성 ~ 황새바위 순교지 ~ 무령왕릉 ~ 공주박물관 ~ 정지산유적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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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