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너머 황해도 코앞 교동도, 당집서 연산군 유배의 한(恨)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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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북쪽 섬 교동도에 다음달(6월)이면 교동대교가 개통된다고 한다. 6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드디어 교동도가 육지와 연결되는 것이다. 교동은 아직도 만만히 다녀오기가 쉽지만은 않은 섬이다. 우선은 강화터미널에서 교동행 여객선 출발지인 창후리를 왕래하는 버스편이 많지 않고, 창후리에 도착해도 물때가 맞지 않으면 한식경을 기다려야 배에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불편함으로 지켜진 섬, 시간 저 너머에 고이 남아 있는 섬.
다리가 개통되기 전, 뱃길로 교동 답사길에 오른다. 일찌감치 강화터미널에 도착하여 창후리행 버스로 갈아탄다. 미리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맞추는 것이 좋다(문의 032-934-9105). 그리고 터미널에 왔으면 다음을 위하여 안내창구에서 강화지도와 버스시간표 구하는 일을 잊지 말자. 물때도 미리 알아보자(화개해운 032-933-3212). 앞으로는 이런 부지런함도 필요 없겠지… 차가 다리 건너 훌쩍 넘어가 버릴 것이니.
배의 검표는 신분증 점검과 함께 군인아저씨의 몫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동의 북단과 북한의 황해남도 배천군은 불과 2km 여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여객선은 갈매기를 앞세우고 15분 후 교동 월선선착장에 도착한다.
이런 첨예한 지역 교동도에 두 개의 나들길이 만들어져 있다. 강화나들길 9, 10번 코스이다. 오늘은 9번 나들길을 걸으려 한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사람들의 삶이 있는 정겨운 길이다.
여객대합실을 지나 100m 쯤 나아가면 좌측 산등성이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리본이나 안내판은 없다. 오늘은 코스를 시계방향으로 돌고자 해서 택한 길이다. 잠시 숲길을 지나면 바다 둑길이 보이는 시멘트 농로길로 내려간다. 여기에서 좌로 방향을 잡아 바다를 좌로 끼고 둑길로 나아간다.
클로버, 들꽃, 갈대, 쑥 같은 들풀을 스치며 바닷바람 속을 걷는 길이다. 간간히 안내판과 리본이 길을 안내하고 터미널에서 받아온 지도에 중요한 랜드마크가 기록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좌측(남) 바다 넘어는 석모도의 북쪽 해안과 마주하고 있어 바다가 마치 강폭처럼 가깝고 잔잔하다.
둑길 끝 집 몇 채 나타나면서 옛 포구 자리에 안내판이 서 있다. 동진포(東津浦)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고려사의 기록을 살려 설명서를 붙였는데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으며 하정사(賀正使: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에 가는 사신)가 서해로 나아가기 전 일기(日氣)를 살펴보고 출발했던 곳이라 한다.
이들이 머물던 숙소 동진관이 있었다는데 흔적이 없다. 교동군읍지(喬桐郡邑誌)에는 교동팔경(八景)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머리를 동진송객(東津送客: 동진포에서 객을 보내고)이 차지하고 있다. 적혀 있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구절은 바다는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갈 길이) 삼만리(海闊天長三萬里)라 했다. 지금은 엎어지면 코 닿을 중국 땅이지만 그 시절 중국은 아득하기만 했던 곳이었다.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나아가면 옛 읍성(인천 기념물 23호)의 남문이었던 자리에 돌 홍예(虹霓)가 덩그렇게 남아 있다. 인조 7년(1629년) 경기의 두 수영(水營)을 통합하여 경기수영을 설치하고 정3품 수군절도사를 교동부사를 겸임토록 할 때 쌓은 읍성이다. 동문, 북문, 남문이 있었는데 북문과 남문은 언제 무너졌는지 알지 못하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졌다 한다.
옛 기록에 남문 밖에서 장이 열렸다는데 흔적은 없고 읍성 안은 주민들 삶의 터전이 되어 거의 남아 있는 유적은 없다. 다만 살펴보아야 할 몇 개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부근당(扶芹堂), 햇미나리 나면 겸손한 뜻 살려 연산군께 바친다
홍예 안으로 들어가 좌측 시멘트 마을길을 잠시 오르면 두 개의 이동통신사 안테나가 삐죽 서 있다. 안테나 방향 밭 위쪽 고목나무 곁에 초라한 당집이 눈에 띈다. 부근당(扶芹堂)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강화에 위리안치 되었다 명(命)을 다한 연산군을 잊지 않고 그 부인 신씨와 함께 모시는 당집이라 한다. 햇미나리(芹)가 나면 윗분께 드린다는 겸손한 뜻(獻芹之誠)을 살려 연산군에게 바친다는 뜻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어쩌면 마을이나 관아의 수호신을 모신 부군당(府君堂)이 아닐까 모르겠다.
돌아내려와 홍예의 동쪽 길로 나아가면 우측으로 집 옆모서리에 돌우물이 보인다. 황룡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태종 18년(1418년) 3월 교통현 우물에 황룡이 무더기로 나타난 일이 실록에 남아 있다. 바로 그 우물이라 한다. 내용이 흥미롭다.
“수영(水營) 앞에 우물이 있는데, 선군(船軍) 등이 물을 긷고자 하여 우물가로 갔습니다. 황색 대룡(黃色大龍)이 우물에 가득차서 보니, 허리가 기둥같이 컸습니다. (水營前有井, 船軍等欲汲水就邊, 黃色大龍滿井 而見腰大如柱)”
아쉽게도 우물을 들여다보아도 황룡은 보이지 않고 관리하는 이가 없어 주변이 어지러우니 마음만 심란하다.
우물 바로 북쪽 언덕은 교동읍성 관아가 있던 곳이다. 넓은 터에 안해루(安海樓) 기둥 중 두 개만 남아 옛 관아 터를 지키고 있다. 대룡리 교동초등학교에 또 다른 두 개의 안해루 돌기둥이 남아 있다. 100여 년 전 무지하던 그 시절 학교를 지으면서 옛 유적에 있는 쓸 만한 기둥을 가져다 사용했던 것이다. 비록 글씨로 훼손은 되었지만 이제라도 제자리로 가져다 세웠으면 좋겠다. 교동군읍지 지도에는 읍성의 건물 그림이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 복원은 하지 못할지라도 사진을 찍어 안내판도 붙이고 건물 위치도 찾아 설명서라도 세운다면 이렇게 황량하지는 않을 것인데.
관아터에서 다시 길로 내려와 길 따라 마을 동쪽으로 100m쯤 가면 창고건물이 보이면서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여기서 좌향좌 북쪽을 바라보자. 손수레 하나 다닐만한 시멘트길이 앞쪽 언덕으로 연결된다. 30m 쯤 나아갔을까 또 다른 돌우물이 나타나면서 밭두덕에 돌비석이 서 있다.
‘燕山君溝邸址’(연산군구저지). 교동면에서 세운 것인데 연산군의 격리된 유배처를 표현한 말인 듯하다. 교동에서 연산군 유배처(적거지:謫居址)로 여겨지는 곳은 3곳이 있다. 첫째는 읍성 안 읍내리(현 자리를 유배처로 보는 견해, 또는 부근당 근처를 유배처로 보는 견해), 둘째는 옛읍(古邑)이 있던 고구리 연산골, 셋째는 섬의 동쪽 끝 봉소리 신골이다.
어느 곳이 맞는 것일까?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는 없다. 그 날의 일을 되돌아보자. 중종실록 1년(1506년) 9월 7일 기록에 연산군을 교동에 호송한 호송관들의 보고가 실려 있다.
“안치할 곳에 이르니, 위리(圍籬: 울타리치고 가두는 일)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조그마한 문 하나가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圍籬處甚狹窄, 不見天日, 但有一小戶, 僅通饌物傳語而已).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중드는 시녀들(女侍)들이 모두 목 놓아 울었습니다. 신(臣) 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多謝多謝).’ 하였습니다.”이처럼 연산군의 유배는 가혹했던 것이다. 이 때 교동현감은 연산군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지근(至近)거리에서 항상 관리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에 누구와 내통을 한다거나 탈출이라도 시도한다면 낭패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읍치(邑治)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고 살펴보았을 것이다. 이런 가정아래 위 3곳의 유배지를 본다면 고구리 연산골이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중종 때 발간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화개산은 현(縣) 남쪽 3리(縣南三里)에 있다 하였다. 바꾸어 표현하면 그 당시 교동현(縣)의 읍치(邑治)는 화개산 북쪽 3리 현재의 고구리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교동읍성은 인조7년(1629년) 축성한 것이다. 그러니 교동읍성이 들어서기 전 읍성 위치에 유배지가 있었다면 당시로서는 산(화개산) 넘어 바닷가 마을, 한양과 가까운 곳에 안치시킨 셈이니 읍치에서 멀고 언제라도 탈출하거나 외부인과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 두는 셈이 된다.
이제 읍성을 돌아 나온다. 바닷가 쪽 우측으로 나지막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요즈음 이름은 남산, 옛 이름은 진망산(鎭望山)이다. 논 옆 포장도로가 남산 앞 포구 남산포(南山浦)로 이어진다. 남산포 마을로 들어서면 삼거리 앞에 태양열집열판을 얹은 두 집이 마주 보고 있다. 그 집 앞쪽 낡은 집 담장 옆에는 중요한 석물(石物)이 뿌리박고 서 있다.
인조 7년(1629년)에 화성 당항성 화량(華梁)에 있던 수영(水營)을 이곳 월곶진 기지(基址)로 옮기면서 읍성을 쌓았고, 11년(1633년)에는 삼도통어영(三道統禦營)을 설치하여 종2품인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를 배치하여 기해호(幾海湖 경기 황해 충청) 삼도의 수군을 관장케 하였는데 그 중심 포구가 남산포였다. 이 때 배를 묶어 두는 계류석(繫留石)이 하나 남았는데 바로 이것이다. 앞집 할머니 말씀이 여러 번 패어 내려 했는데 어찌나 뿌리가 단단히 박혔는지 패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휴우~ 다행이구나.
남산포는 이제는 이곳 어부들이 드나드는 작은 항구가 되었다. 고려 때에는 송나라와의 주요 무역로였다 한다. 산동반도 등주를 떠난 중국 배는 황해도 북부를 거쳐 장산곶을 돌아 교동도 앞바다를 지났다고 한다.
당시 송나라 사신들 뱃길이 무사하기를 빌던 당집이 있었다 한다. 당(堂)의 이름도 사신당(使臣堂)이다. 부서진 당집은 다시 남산포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쪽에 지어 놓았다. 그런데 시멘트로 조그만 축사(畜舍)처럼 지어 놓았으니 당을 지키는 신(神 아마도 임경업 장군)께서는 살기 싫으실 것 같다.
또한 이곳 남산에 봉수가 설치되었다. 주변 섬, 즉 볼음도, 말도, 장봉도 등에서 서해안 외방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신속히 수군통어영으로 알려야 수도권의 안녕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는 시기에는 통어영 봉수는 국방에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첨예한 이곳을 교동팔경에 진산석봉(鎭山夕烽 남산의 저녁 봉화불)이라 하면서 아름답게 읊고 있으니 그 여유로움이 부럽다.
수군 관장하던 포구 남산포, 아직도 남아있는 계류석(繫留石)
그런데 통어영에 배는 얼마나 있었을까? 놀랍게도 대소전함(大小戰艦)이 19척뿐이었다. 게다가 오래 되어서 시원치 않았으니 조선말 국방력이란 가슴 답답하구나. 무기도 신식 대포도 없이 총통(銃筒) 종류와 조총(鳥銃), 노(弩) 따위로 무장했는데 만일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당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려 때에 이곳에는 왜구(倭寇)의 침범도 많았는데 그 때도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나들길 리본을 따라 대룡리로 향한다. 일제시대에 읍내리에 있던 교동읍치(면사무소)가 대룡리로 이전하였다. 한국전쟁 후 사람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1만2000명이 넘던 교동인구는 이제 4000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룡시장도 건물만 남고 사람 발길이 뜸하다. 교동은 곳곳에 빈 집도 많다. 번성하던 교회도 곳곳에 폐허가 된 채 잊혀져 있다. 다리가 연결된 후 다시 인구가 늘었으면 좋겠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면 같은 시장 길을 지나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 먹는다. 중국집이 두 집 있다. 자장면 맛도 훨씬 예스럽다. 다음에 오면 이발도 해 보리라.
나들길을 잠시 벗어나 면사무소 앞길로 간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좌측 화개산(華蓋山) 정상길과 직진 화개사길로 나뉜다. 화개산 정상길로 가자.
600m 쯤 가면 안내판이 서 있는 4거리가 나온다. 우측 150m 지점에 또다른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커다란 비석이 있다. 앞서 필자가 가능성이 있다 한 곳이다. 다시 4거리로 돌아 나와 화개산등산로 0.9km가 가리키는 길로 들어선다. 복원해 놓은 돌 한증막을 살펴보고 산길을 오르면 화개산성의 무너진 성돌들을 만난다.
혹자는 이 성(城)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관미성(關彌城)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91년(광개토왕 1년) 고구려는 백제의 관미성을 20일간 공략하여 점령한 후 파죽지세로 10여 성을 더 점령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미성은 ‘사방이 웅크린 듯 절벽으로 바다가 감쌌다(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 것이라면 이 성은 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성이 된다.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존재했던 성이라 하는데 조선에 와서는 세종, 명종, 선조, 영조 시절 수축(修築)한 기록들이 있다.
성 안길을 오른다. 언제나 마셔도 시원한 샘물이 있다. 그 뒤로는 효자묘라는 민묘가 하나 있다. 삼국시대에 화개산성에 근무하게 된 효자 아들이 있었는데 적삼을 장대에 매달아 북루에 걸면 밖에서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자식의 무사함을 알았다 한다. 하루는 장수가 적군과 내통하는 신호라 여겨 금지시켰는데 장대에 매단 아들 옷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아비는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 효자의 아비묘가 이 묘라는 전설이다.
고려 목은이 묵던 갈공사, 성혈바위. 화개사, 안양사…
효자묘에서 200m 오르면 화개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높이 260m를 알리는 정상목(頂上木)이 서 있다. 옆으로는 산불감시초소와 정자가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녘땅은 바로 코앞이다. 나무 없는 민둥산이 가슴 아프다. 또한 눈 밑 고구리저수지 동쪽 기슭에는 고려시대 목은 이색(李穡)이 공부하던 갈공사(葛公寺: 213번지 일대)가 있던 곳이다. 이제는 흔적도 없다.
잠시 능선 길 동쪽으로 간다. 성혈(星穴, 性穴)바위가 있다. 바위 표면에 구멍을 판 것인데 별자리를 새긴 성혈(星穴)도 있고, 다산(多産)을 기원하여 여자의 성기(性器)를 새긴 성혈(性穴)도 있다 한다. 이곳은 하늘에 빌던 星穴인 것 같다. 다시 되돌아 와 능선길 서쪽으로 향하면 화개산봉수터가 있다. 돌을 쌓아 유적을 재현하여 놓았다. 여지승람에 ‘남으로 강화부 망산(網山)에 응하고, 동으로 강화부 하음성산(河陰城山)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제 하산이다. 하산 길 중간에 문무정(文武井) 자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교동군읍지 지도에는 화개산 동서쪽에 각각 문정과 무정이 그려져 있다. 그만큼 화개산 명물이었을 것이다. 이내 화개사에 닿는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연혁 미상이라 했는데 여지승람이나 읍지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적어도 조선 이전부터 법등(法燈)을 밝힌 절이다.
1930년대에 토지도 3826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각종 후불탱화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 불상도 3분이 봉안되어 있었다 한다. 아쉽게도 모두 일실되었다. 다행인 것은 현 주지스님이 아름다운 도량으로 가꾸고 있어서 지나는 객(客) 누구나 눈과 마음의 아름다움을 채우고 올 수 있다.
절을 떠나 나들길을 따르면 곧 교동향교에 닿는다. 이 땅에 처음으로 공자상을 봉안한 향교라 한다. 원래 고읍이 있던 화개산 북쪽에 있었는데 읍치와 함께 옮겨 왔다. 이제 귀가길 선착장을 향해 나들길을 간다.
숲길 가다 보면 제법 큰 나무 아래 나무벤치가 놓여 있는 쉼터를 지난다. 안내판에는 안양사(安養寺)터라 기록하였다. 여지승람에는 안양사가 화개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범우고에는 폐사되었다 했으니 조선 중기에 없어진 절이다. 그 자리에 산새만 짹짹거린다. 영원한 것이 없다 했으니(諸行無常) 절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구나. 마지막 배를 타고 강화로 돌아온다.
교통편 - 강화터미널 ~ (32번 버스) ~ 창후리 ~ (선편) ~ 교동도
걷기코스 - 교동 선착장 ~ 읍성 ~ 남산포 ~ 대룡시장 ~ 화개산 ~ 화개사 ~ 향교 ~ 안양사지 ~ 선착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